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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Oct 05. 2021

관계(relationship)

재지 않은 사이가 많아졌으면......

우리 둘째에게 단짝 친구가 있다. 

섬세하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녀석과 성향이 비슷한 친구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대뜸 “엄마, 나 ㅇㅇ한테 감동했잖아.”라며 운을 뗀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가 배가 아파서 보건실에 갔거든. 그런데 ㅇㅇ이가 보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괜찮냐고.” 

“정말? 걱정돼서 기다렸구나. 고맙네.” 

“그리고 엄마, 내가 저번에 리듬악기를 안 가져갔거든. 엄마가 준비물을 안 챙겨줘서.” 

“어……” 

“그때도 ㅇㅇ이가 캐스터네츠 빌려 줬어. 난 탬버린 하고 싶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 친구 칭찬을 하면서 엄마 ‘디스’까지 일타쌍피를 날린다. 


하교하는 길에 잠깐 놀고, 학원 끝나는 시간 맞추어 기다렸다 놀고, 

그러면서도 아쉬워 언제 또 놀 수 있냐고. ㅇㅇ이 엄마한테 카톡 보내 보라고. 

하루 종일 그 친구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도 그랬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공기놀이하고, 수다 떨고, 하교 후 발야구, 고무줄놀이, 피구, 

심지어 말뚝박기까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놀던 때가 말이다. 

머리가 크면서 몸으로 하는 놀이는 줄었지만 여전히 친구와 함께 꼼지락꼼지락 무언가를 했다. 

그땐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라는 사회에 발 딛으며 친구와는 결이 다른 동료가 생겼다. 

친구보다는 좀 더 공적인 관계, 계산적인 사이의 그들과 그럭저럭 잘 지낸다. 

결혼을 하면서 남이었던 남자와 가족이 되었고, 그 남자의 가족이 또 다른 나의 가족이 되었다. 

친구와 동료보다 훨씬 복잡한 가깝고도 먼 관계의 사람들 속에 균형을 맞추며 지낸다. 


엄마가 되면서 이제는 아이의 친구 엄마와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 애매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잘 지낼 때는 엄마들도 잘 지내지만 

아이들 사이가 틀어지거나 반이 달라지면 소원해지는 것이 또 이런 사이이다. 

일을 할 때는 엄마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조차 자연스럽게 ‘열외’되었다. 

그리고 사실 어색하다. 아이들 노는 동안 벤치에 마주 앉아 있기가. 


처음부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 주기 망설이게 된 것이. 

잘 웃고 잘 울고 상대가 장난 삼아 속여도 정말인 줄 알고 잘 속아버리는 사람, 그게 ‘나’란 사람이다. 

겉보기엔 다소 차갑고 엄격해 보이지만 속은 꽤 말랑말랑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 우리는 타고난 기질과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결과치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원하든 그렇지 않든 거리의 간극을 조절하며 지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원만한 인간관계’ 일 테니까. 


한없이 ‘그냥’ 좋은 지금 둘째 녀석처럼 엄마인 나도 그런 친구가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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