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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Oct 17. 2021

너 때문은 아니야

중국 유학의 인연


귀국 후 바로 복학을 했다. 

이 때는 정말 중국어에 물이 오른 시기였다. 

중국어 텐션은 최고였고,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동아리 활동도 학과 일도 모두 접었다. 

도서관에 앉아 고3 수험생처럼 공부했지만 스트레스는 별로 없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4학년이 되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딱히 들어가고 싶은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 밑에서 일을 하느니, 내 사업을 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두 군데 입사지원을 했고 모두 최종 면접까지 가서 합격했으나 나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중국어를 쓸 수 있는 회사였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회사도 나 자신도. 


사실 핑계였는지 모른다. 

불안했다. 

일반 사기업에 가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왠지 더 이상 회사를 다니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한 번도 전업맘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로 했다. 

임용고시를 보겠다 결심했고, 학부 때 교직이수를 해놓지 않아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낮에는 출강이나 과외를 했고, 저녁엔 수업을 들었다. 

이때 수입이 지금의 수입보다 많았다. 

나는 젊고 열정적인 선생님이었고, 이대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잠깐이었다. 

여전히 나는 불안했다. 

중국어 임용고시가 만만치 않은 것도 한몫했다. 

국영수도 아니고 그나마 매년 뽑는 교사 수는 들쑥날쑥 있었다. 




유학 때 만난 선배가 있다. 

오빠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고 본과생(本科生)이었고 내 방 바로 앞에 살았다. 

산동대학(山东大学) 외국인 기숙사는 모두 1인실이었고 남녀 구분이 없었다. 

본과생이지만 외국인이었기에 그들도 외국인 기숙사에 지내는 것이다. 

나는 남향 방이었고 오빠는 북향 방이었으니 정확히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한국사람이라 서로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었다. 

오빠는 통역도 도와주고 나의 작문 숙제도 봐주곤 했고, 

나는 가끔 떡볶이나 불고기 등을 만들면 가져다 주기도 했다. 

오빠는 나를 정말 동생처럼 잘 챙겨주었고 나는 그런 오빠를 좋아했다. 


오빠는 졸업을 반년 앞두고 있었기에 나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오빠가 ‘해양경찰’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기했다. 

그는 어디에 메여 있을 사람이 못되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또다시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것만 봐도 보통 사람의 타임스케줄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빠의 어머니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계셨고 당연히 그 일을 이어해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오빠가 공무원이 되었다고? 그것도 계급 조직인 ‘해양경찰’이 되었다고? 


오빠가 해양경찰이 되어서 나도 해양경찰이 된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양경찰은 외국어 특채로 여경(女警)을 뽑지 않았다. 

지루한 썸을 타며 지내 던 어느 날 오빠가 해양경찰에 외국어 특채 여경을 뽑는다고 알려주었다. 

여경들은 함정 근무도 하지 않으니 위험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중국어는 가장 텐션이 좋을 때였다. 

1차 필기시험은 중국어 시험이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HSK 중급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차가 체력검정, 3차가 면접이었는데 면접은 한국어와 중국어로 진행되었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2차 체력 평가였다. 100m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윗몸일으키기 등을 측정했고 우려와 달리 5등급 중 3등급을 받았다. 


나는 해양경찰 외국어 특채 최초의 여경이다(물론 여경 동기 41명이 있었다. 지금은 몇 명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특수정을 타고 나가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 있는 대형 함정에서 면접을 봤었는데, 

언론사 취재도 있을 만큼 이색적인 면접이었다. 

한국어 면접 준비는 해양경찰청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보며, 조직도, 역할, 임무 등을 암기했다. 

그 외 기본 상식은 일반 사기업 면접 수준에서 준비했다. 

중국어 면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3년 동안 매주 중국어 스터디를 해왔기 때문이다. 

인민일보(人民日报) 강독, 팀별 토론 등 매주 일요일 명동에 모여 4시간씩 치열하게 스터디를 했다. 

그때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어가 좋았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았던 때이다. 


나는 최종 합격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신임경찰 교육훈련을 위해 입소했다. 

긴 머리는 세팅 파마를 했고, 나의 캐리어에는 동기들과 저녁마다 붙일 마스크 팩이 가득이었다. 

‘입소’를 연수원에 들어가는 것쯤으로 생각할 만큼 당시 나는 정말 경찰에 대해 무지했다. 

2시간 안에 귀 밑 2cm 단발머리를 하고 오라는 교관의 지시를 받기 전까지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훈련이었다. 

수도 없이 기합을 받았고, 나의 말투는 이상해졌고, 저질 체력은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이틀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불침번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해본 적 없는 단발머리는 나를 못난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훗날 남자 동기들 말에 의하면 분명 입교할 때 눈에 들어오던 여자 동기들이 있었는데, 2시간 만에 사라졌다고. 여자는’ 머릿발’이 맞나 보다. 


기동복을 입고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받으며 민간인(民間人)에서 경찰관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첫 한 달은 외출이 되지 않았다. 면회만 가능했다. 

훈련 2주째 주말 오빠가 면회를 왔다. 

내가 무슨 이병도 아닌데 단 군것질을 양손 가득 들고. 

이게 뭐냐고 한참을 쏘아붙이느라 아까운 면회시간을 거의 다 써버렸지만, 면회를 와준 오빠가 고마웠다.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인천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인천 사람인 나는 해양경찰이 있다는 것도 원서 접수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렇게 나는 직장인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두렵고 떨렸지만 괜찮았다.

발령지에는 오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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