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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May 03. 2021

그 여자의 봄

사십 년 만에 조우하는 인생의 선물

 봄이다. 따뜻한 봄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을 느낀다. 상투적인 표현이 싫지만, 봄은 봄이다. 앙상하던 가로수에도, 공원 꽃나무에도 푸릇푸릇한 싹들이 제 역할을 다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흔히들 희망을 봄에 비유한다. 무엇을 꿈꿀 수 있는 시기, 어떤 일을 시작하는 순간에 빗대곤 한다. 그래서 봄이 되면 너도나도 설렘에 못 견디겠다는 듯이 집 밖으로 뛰쳐나가나 보다. 봄은 부드럽지만, 차가운 겨울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매서운 녀석이다. 나는 봄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 삶은 대체로 무난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장인이 되었고 적당한 남자를 만나 적당히 연애하다 적당한 시기 결혼을 했다. 아이 둘을 낳았고 엄마가 되었다. 구구절절이 적자면 ‘82년생 김지영’ 버전이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넣어두기에는 나름의 사연도 없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대한민국 김지영처럼 살았다.



 15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아이를 낳으면서 국가가 허락해 주는 출산휴가 90일을 두 번 다녀왔다. 그 외에는 출근했다. ‘쉬지 않은 이유’라 쓰고 싶지만, 쉬지 못했던 이유는 단연 ‘돈’이었다. 내가 쉬면 가계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렇게 작년까지 줄곧 일했다. 직장에서 모두가 알아주는 엘리트는 아니었지만, 전문성과 책임감, 눈치를 겸비한 나름 ‘일. 잘. 러’였다. 인생의 변곡점 ‘마흔’을 지날 때쯤 더는 일하기 싫었다. 원래 인생은 깊은 웅덩이에 빠지는 일보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사건이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뒤를 돌아보니 그토록 열심히 그려온 나의 인생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찢어진 도화지 같았다. 다시 그려야 했다. 찢어진 도화지 위에 계속 그려대 봤자 그 그림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를 위해 지금을 미루는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봄’을 선물했다.





 무언가 시작하기 딱 좋은 사십대다. 아직은 아마추어 같은 어설픔도 애교로 봐줄 만하다. 내 멋에 취한다 해도 ‘제 멋대로인 아줌마’라기보다 취향이 분명한 멀티 페르소나를 가진 ‘옆 집 언니’에 가깝다. 다른 이의 시선이 무서워 나의 철학 따위를 양보하지 않지만, ‘모난 정’이 되어 돌 맞기를 자처하지 않는 센스 정도는 가지고 있다.





 휴직을 하고 가장 먼저 시작한 프로젝트는 ‘바디 프로필 찍기’이다. 살이 있는 몸은 아니었지만, 근육이 있는 몸도 아니었다. 마른 몸에 쳐진 뱃살을 보면 누가 봐도 출산한 여자의 몸이다. 늘어진 배 위에 분명한 王자를 만들고 싶었다. 나란 여자, 원래 중간이 없는 여자다. 100일 동안 식단관리와 운동으로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초콜릿 복근을 발굴했다. 멋지게 바디 프로필을 찍었고 SNS에 당당히 올렸다. “40대 맞아요?” “언니~ 진짜 멋있다!” “우와~ 부러워요!” 등등의 반응이 댓글로 달렸다. 일일이 대댓글을 달지 않았다. 그건 촌스러운 일이다. 의례 하는 댓글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마치 그런 반응을 기대한 사람처럼 비추기 십상이다. 댓글마다 “좋아요”를 눌러주며 그들의 관심에 성의를 표하는 정도로 시크함을 유지한다. 내 몸은 변하겠지만 사진은 영원할 테니 그것으로 되었다.





 문학소녀였던 적은 없지만 방학이면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중학생이 꼭 읽어야 하는 문학작품 00선’ 리스트를 지워가며 책에 빠져 지냈다. 분명 중학생 필수 작품인데 이해가 가지 않은 구절들도 많았다.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었지만 당시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휴직을 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한 번에 책 한 권을 쭈욱 읽고 싶다.”라고 답했다.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읽는 독서는 자꾸 흐름이 끊겨 읽었던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번거로움이 생기곤 한다. 나는 그 소원을 이루었다. 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1日 1讀을 실천하며 인증한답시고 SNS에 올렸다. 비슷한 취향의 follower가 늘어났다. 심지어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권을 읽기도 했다. 매일 책 한 권씩을 읽어대니 “왜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느냐?”라고 묻는다. 허기가 졌던 모양이다. 지금껏 열심히 달려온 내 인생이 헛헛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답을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반은 찾았고, 반은 찾고 있다.





 또 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 바로 온전한 내 시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싶었다.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책 읽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모두 내 컨디션에 맞추어 정하고 싶었다. 회사 사정이 아닌, 나의 사정에 맞추어 말이다. 온전한 나의 시간이 간절했다. 분명 하루를 사는 건 나인데,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 같았다. 엄마 출근시간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일어나 퇴근 무렵까지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다 패잔병 행색으로 돌아오는 내 새끼들에게도 마음껏 시간을 쓰게 하고 싶었다. 의지만으로는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이럴 땐 “Thank you, COVID-19”라고 감사인사라도 해야 할까? 온전히 일 년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살았다.





 나에게 요즘 같은 ‘봄’이 있었을까? 내가 하고 싶으면 그저 하면 된다. 하고 말고는 내가 정한다. 평일 오전에 카페에서 책 읽기, 평일 오후에 쇼핑하기, 지자체 알짜배기 강좌 수강하기, 영어 공부하기, 유튜브 채널 운영하기, 아이들 학원 안 보내기. 참 별 것 아닌 별 것이다. 해보니 별 것 없지만 안 해봤으면 후회할 뻔했다. 올해는 봄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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