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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Sep 24. 2023

오페라 부파, 혁명의 두 얼굴

뒤로 걷는 오페라 #4

  벨칸토(Bel Canto). 글자 그대로 ‘아름답게 노래 부르기’,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 오페라 세리아의 시대를 주름잡던 창법이라고 할 수 있죠. 오페라 가수의 화려한 꾸밈음과 초절 기교의 역량으로 관객을 감동하게 만들던 시대였습니다. 카스트라토 소프라니스트의 히스테릭한 고음에 기절하는 관객조차 있었다고 하니 관객을 놀랍게 할 만한 기교는 오페라 가수에게는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오페라 극을 이끌어가는 스토리의 구조적 완성도,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페라가 연극으로부터 비롯되었다기보다,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그 배경이 되었겠지요. 스토리의 개연성이 부족할수록, 가창자의 역량으로 스토리의 빈 곳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이제 관객들은 기교가 기교를 부르는 현장에서 피로감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정제된 영웅담, 인간 속의 신성을 탐구하고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노래하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투영한 이야기로는 더 이상 시대의 감성을 담아내기 어려웠습니다.          

오페라 리허설, 마르코 리치, 18C


  18세기. 중세 봉건 시대와 왕조 시대의 사회체계가 가진 한계와 부조리는 바야흐로 변혁을 향한 사회적 압력에 안과 밖에서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17세기 이후로 구조적 압력은 날로 거세어지고 있었죠. 왕족과 귀족들이 추구하는 (듯이 보이는) 고상한 이상은 현실과는 정확히 반대의 지점에 놓여있었습니다. 벨칸토의 초절기교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혁명의 공기가 유럽 전역을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뒷골목에서는 이미 귀족들과 체계를 비웃고 조롱하는 공연들이 술집에서, 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집니다. 작지만 제법 오페라 무대를 닮은 공간들도 생겨나지요. 지극히 이기적인 쾌락, 특히 성적인 쾌락에 빠진 귀족들의 행실을 비꼬는 그로테스크한 무대들이 뒷골목의 공연장을 채웁니다. 관객들은 마시고 떠들고 박장대소하면서 무대 위의 과장된 몸짓들을 조롱합니다. 코미디의 형식을 가진 새로운 카타르시스의 무대가 밑으로부터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 나갑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대로 투영된 무대는, 코믹 오페라,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의 시대가 열리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성적 소재들은 구시대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공격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난행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구시대의 권위는 신기루처럼 그 힘을 잃어갑니다. 동시에 더러운 기존 권위의 반대편에 선 관객들에게 모르던 욕망을 가르치고,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트리거로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당대 하층민의 조롱과 냉소주의를 자극하기 위해 활용된 음란한 무대들은 권위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 장치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무대가 불러온 새로운 희생자들을 제대로 발견하거나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폭력적인 무대 위에서 희롱당하면서도 웃고 즐기는 듯 보이는 여성의 모습은 당대의 ‘젠더’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상이 자유를 부르짖을 때, 오페라는 소위 ‘성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을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시각이지요.      


오페라가 끝난 뒤, 장 미셀 모로, 1778

         

  혁명의 시대정신은 이처럼 두 얼굴을 가졌습니다. 새로운 사회 체계를 불러온 프랑스혁명의 지향점, ‘자유, 평등, 박애’의 위대하고 새로운 이상은 ‘인간’의 것이라고 아름답게 선언되었지만, 결코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는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적어도 ‘평민 이상의 신분에 해당하는 어떤 남성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평등의 이상이 실질적으로 ‘모든 인간’의 권리로서 인정받고 ‘법제화’되기까지는 그로부터 3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죠.


  이런 오페라 부파의 시대는, ‘우리의 어린 천재’, 모차르트가 활약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흔히 피아노를 잘 친 덕분에 어려서 성공하고 일찍 세상을 뜬 음악 천재 정도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지만, 적어도 오페라를 통해 보여준 그의 사회의식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면모로 다가옵니다.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돈 죠반니’는 오페라 부파의 가장 성공적인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죠.     


모차르트, 장 밥티스트 그뤼즈, 18C


  오페라 세리아가 던져준 과제, 드라마로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오페라 부파의 시대는 대본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소재는 정가극의 이상적 세계관과는 엄청난 괴리를 보여줍니다. 결혼을 둘러싼 소동,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희대의 난봉꾼, 이를 둘러싼 여성들의 미묘한 정서와 여성을 지키려는 남성들의 현실적인 모습들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우리는 그 소동의 행간 속에서 시대의 거대한 변화를 눈치채게 됩니다.         


피가로의 결혼 중 한 장면, 19C


  모차르트는 엄혹하다 못해 차라리 코미디처럼 보이는 희비극적인 현실을 특유의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선율,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선율에 실어 전달하는 데, 놀라운 재능을 보여줍니다. ‘돈 죠반니’ 속에서 시골 처녀를 농락하기 위해 추파를 던지는 죠반니의 악행을, 단순하지만 우아하고, 부드럽지만 잊기 힘든 선율로 옮길 수 있는 재능은 시대를 통틀어도 발견하기 어려운 귀한 재능임이 분명합니다.


  뒷골목의 취한 관객들을 위한 무대의 소재로서나 그럴듯해 보일 이야기를 담백하고 정제된 음악으로 구현해 내는 위대한 재능은, 역설적으로 거친 ‘시대정신’을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클래식 오페라의 무대로 끌어낸 좋은 무기가 되었습니다.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조롱과 풍자의 무대는 혁명의 공기를 마시며 새로운 시대를 예감한 모차르트가 세상에 던진 흥미로운 질문들이 아닐까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죠반니’는 뒷부분에서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부파의 시대 이후 현실의 세계 속으로 발을 디딘 ‘오페라’는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한쪽에는 ‘성모 마리아’로 불릴만한 천상의 여성이 서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연약하고, 고결하지만 순종적이며, 남성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상입니다. 남성으로부터 사랑받지만, 자신의 욕망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영원한 조력자로 남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의 시대정신에 맞게 과감히 성적인 추파를 던지는 여성입니다. 소위 ‘팜므파탈’이죠.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유혹으로 남성을 위기에 빠뜨리고 스스로도 그 결과로 죽음에 이르거나 추락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자주 등장하는, 잔소리로 남성을 귀찮게 굴거나 히스테릭하게 괴롭히는 여성도 존재하긴 합니다. 이 모든 캐리터의 공통점은 그들이 그저 누군가의 ‘대상’ 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질문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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