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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Sep 28. 2023

소름 끼치는, 창백한 그 빛

뒤로 걷는 오페라 #8 오페라 '람메르무어 루치아'

  1600년 이후 유럽은 절대 왕정 시대를 구가합니다. 중상주의가 나타나고, 제국에 의한 세계 식민 지배의 발판이 될 대항해시대가 열렸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의 자긍심에 가득 찬 인권 선언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중세의 봉건적인 사회 질서가 내적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토지를 기반으로 한 공고한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상업으로 성공하여 자본을 축적한 계층이 등장합니다. 여전히 강성한 권력을 구가하는 영주들도 존재하지만, 부와 지위가 점차 색을 발해 가는 귀족 가문일수록 불안감은 고조됩니다.   


꽃을 그린 17세기풍의 정물, 네덜란드 화가, 1829

                

  음악사적으로는, ‘찌그러진 불협화음’으로 불린 바로크(Baroque) 시대로 들어선 참이었죠. 앞에서 언급했듯이, 언어를 통한 메시지의 적확한 전달을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메라타 그룹이 제안한 모노디 양식은 오페라의 기본 구성이 되는 레치타티보(recitativo), 즉 말하듯이 노래하는 가창의 형식을 정착시킵니다.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레치타티보를 수용하고, 즐길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성 넘치는 선율이 아름다운 아리아는 오페라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도 쉽게 즐길 수 있습니다만, 줄거리를 서사하는 레치타티보는 오페라를 자주 접하지 않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사람들, 아니 유럽 사람들은 레치타티보를 진심으로 즐긴 듯합니다. 온 이탈리아에 수많은 오페라 극장이 생기고, 신분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오페라에 빠져들었다고 하니까요. 애초, 고대와 중세를 거쳐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같은 음유시인들이 ‘리라’를 연주하며, 길 위에서 읊조리듯 노래하는 문화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레치타티보는 오히려 서사시에 대한 그리움의 미학으로 여겨진 것이 아닐까요.    


바로크풍 사중주단의 연주, 요한 함자, 19C


  초야, 스코틀랜드, 람메르무어     


  이번 장에서는, 비록 17세기에 만들어진 오페라는 아니지만,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실제로 벌어진 잔혹한 사건을 배경으로 작곡된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 루치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835년 작곡된 ‘람메르무어 루치아’는 대표적인 벨칸토 비극 서정 오페라라고 부를 만합니다. 월터 스콧이 쓴 ‘라머무어의 신부(The Bride of Lammermoor)’를 원작으로 귀족 사회의 암투와 한 여성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람메르무어(Lammermoor) 지방. 한 귀족 가문의 딸 루치아는 오빠 엔리코와 가족의 눈을 피해, 가문의 원수격인 집안의 자제 에드가르도를 사랑하여 몰래 결혼 서약을 나눕니다. 하지만 오빠 엔리코는 가문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동생을 정략 결혼시킬 집안을 이미 물색해 둔 상태였죠. 엔리코는 에두가르도의 가짜 편지를 내세워 루치아를 겁박합니다.     


람메르무어의 신부, J. E. 밀레, 1878


  결국 원하지 않는 결혼식을 올린 초야의 밤. 피로연에 모인 귀족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루치아가 광기에 쌓여 신랑을 초야에 살해하고 피 묻은 칼을 쥔 채 피로연에 나타납니다. 이때 부르는 아리아가 바로 그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죠.     


  소름 끼치는 창백한 빛     


  아마도 오페라 팬이라면, ‘람메르무어 루치아’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광란의 씬과 아리아’를 떠올리실 듯합니다. ‘광란의 아리아’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도록 하고, 이번 장에서는 소프라노와 바리톤이 주고받는 이중창이 넘치는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가짜 편지’ 장면 중, 아리아 ‘소름 끼치는 창백한 빛이 내 얼굴을 비치네(Il pallor funesto orrendo)'의 가사와 그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이 곡은 절망 가득한 서정으로 세계적인 소프라노들이 즐겨 부르며, 오페라 팬들에게 사랑받아온 노래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기억하는 분들도 많으실 듯해요.     


LUCIA   

Il pallor funesto orrendo                            

Che ricopre il volto mio                            

Ti rimprovera tacendo                                

Il mio strazio... il mio dolore.                        

Perdonar ti possa Iddio                                

L'inumano tuo rigor.                                    

E ilmio dolor.

      

ENRICO                                                   

A ragion mi fe' spietato                                

Quel che t'arse indegno affetto...                

Ma sitacciadel passato...                                

Tuo fratello io sono ancor.                        

Spenta è l'ira nel mio petto                        

Spegni tu l'insano amor.                            

Nobil sposo...     


루치아

고통에 잠긴 채

소름 끼치는 창백함으로 뒤덮인 나의 얼굴

고통으로 이렇게 말없이 당신을 비난하고 있어요.

신께서 당신의 가혹함과

나의 슬픔을 용서하기를 바라요.     


엔리코

너의 철없는 애정에

무자비하게 대한 것은 이유가 있으니

이제 지나간 날의 일일 뿐

너는 여전히 내 동생이지

내 가슴의 노여움은 꺼졌으니

네 미친 사랑도 단념하거라

네 고귀한 신랑감은...          


람메르무어의 신부, 에밀 시뇰, 1850


  돌이킬 수 없는 절망  


  고귀한 귀족의 딸이라도 결혼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사회. 직업을 영위할 수 없으니, 경제적으로 독립해 재산을 쌓을 길이 없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하므로 결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운이 따르지 않아 결혼을 못하게라도 되면 대단한 귀족 출신이라도 극도의 궁핍에 빠진 채 친지나 지역 내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회. 영국 여성들의 이런 삶은 18세기 제인 오스틴의 시대까지도 여전해 오스틴의 소설에서 주된 글감이 되었지요.


  '람메르무어 루치아'는, 가문의 정략적인 계약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했던 여성이 결국 광란 상태에서 초야에 남편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어버린 사회적 비극을 드러낸 오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빠 엔리코를 통해 당대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적 폭력이 극적으로 그려집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 바로 그 광란의 아리아를 만나 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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