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결혼으로부터 도망칠 방법. 17세기의 스코틀랜드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여성. 그에게 원하지 않는 결혼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가 봅니다. 시대의 변화와 가문 사이의 경쟁, 암투 속에서 가문의 생존, 더 나가서는 영광을 위해 결혼 계약으로 이합 집산하는 당대 귀족가의 관행. 그 관행의 파열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결혼식 초야의 신부는 광적인 착란 상태에 빠져 신랑을 죽입니다. 피로 물든 채, 칼을 들고 피로연에 나타나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둘러싼 현실로부터 떨어져 스스로 만들어 낸 환각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시 돌아오고,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다시 듣는 환상이죠.
람메르무어 루치아, 아나톨 벨리, 1874
루치아는 에드가르도를 다시 만나는, 광기가 만들어 낸 거짓된 행복감과 극도의 공포가 교차하는 혼란 속에 죽어갑니다. 모든 일을 꾸민, 루치아의 오빠 엔리코와 결투를 벌이려던 에드가르도가 비극적인 사건의 소식을 듣고 결국 돌아오지만, 루치아의 임종을 지키지 못합니다. 에드가르도 역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오페라는 막을 내립니다.
달콤한 그의 목소리
다시 광란의 장면. 루치아는 피에 뒤덮인 채 불안한 모습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2층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옵니다. 놀란 목사의 외침. 피로연에 모인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Eccola! Oh giusto Cielo, Par dalla tomba usita!(보세요! 신이시여, 무덤으로부터 나온 것 같은 모습을)'
루치아는 거의 20분에 가까운 광란의 장면을 통해 에드가르도와의 환상 속 재회, 다시 찾아드는 현실의 공포를 오가며 극적인 내면을 표현합니다.
람메르무어의 신부, 에드윈 랜시르
LUCIA
Il dolce suono
Mi colpìdi suavoce!... Ah! quellavoce
M'è qui nel cor discesa!...
Edgardo! Io ti son resa:
Edgardo! Ah! Edgardo mio!
Sì, tison resa!
Fuggita io son da' tuoi nemici...
Un gelo mi serpeggia nel sen!...
trema ogni fibra!... Vacilla il piè!...
Presso la fonte, meco t'assidi alquanto...
si, presso la fonte, meco t'assidi..
Ohimè!... Sorge il tremendo
fantasma e ne separa! Ohimè! Ohimè!
Edgardo!... Edgardo! Ah!...
루치아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네!
아!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내리고 있어!
에드가르도! 난 당신에게 항복했어요;
아! 나의 에드가르도!
그래요, 난 당신께 항복했어요!
난 당신의 원수들에게서 도망쳤어요!...
차가움으로 내 가슴에 소름이 돋아요!...
온몸의 근육이 떨리고... 발이 흔들려요...
연못가에 잠시 나와 함께 앉아주세요.
네, 저 연못가에 나와 함께 앉아요.
아!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요.
유령이 갈라놓으려 해요! 아!
에드가르도!... 에드가르도!...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무덤 혹은 영광
광란의 아리아. 정확히는 '광란의 장면을 위한 아리아'는 오페라 '람메르무어 루치아'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불멸의 노래라고 부를 만합니다. 이 결혼이 결국 루치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왜 상상하기 어려운 폭력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를 관통해 설명할 수 있는 내면의 묘사가 집약된 장면입니다.
루치아의 정서적인 불안정함, 결혼을 약속한 사람에 대한 죄책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공포감 속에서 초야를 치를 남편을 결국 죽이게 되는 광기, 극단적인 살인을 저지른 후의 격렬한 불안을 모두 표현하여야 합니다. 루치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에게는 무덤이거나 영광이 될 수 있는 아리아임이 틀림없습니다. 곡조 자체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기교가 필요한 아리아인데, 광기를 표현할 연기력이 부족해서는 감히 도전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역할이죠.
마리아 칼라스의 루치아를 사랑하는 분들은 아마도 그의 잊을 수 없는 음색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그대로 살려 지나친 꾸밈음이나 카덴차 없이 담백한 절절함을 이어가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칼라스의 음색은 루치아의 정서적인 불안정함, 그 자체를 드러내는 힘이 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공연한 나탈리 드세이가 연기하는 루치아를 좋아하시는 팬들도 많죠. 나탈리 드세이는 연극 무대에서부터 커리어를 시작한 배우답게 광기의 장면에 그만의 필연성을 부여한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습니다. 콜로라투라로서의 기교 역시 오로지 광기를 묘사하기 위한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는 완결의 무대를 만들어 내는 배우이자 놀라운 소프라노입니다. 가슴에 한기가 드는 무대를 보여주곤 합니다. 그가 오페라 무대를 은퇴한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람메르무어 루치아'는 조금은 틀에 박힌, 비극적인 피해자로서의 여성,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그린 멜로드라마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광란의 장면'을 무대로 접하지 않고 람메르무어 루치아의 줄거리를 대한 이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요소가 많습니다.
17세기, 시대를 관통한 그 모든 비극성은 오로지 ’광란의 장면‘을 통해 오롯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