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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Oct 04. 2023

작가의 탄생

뒤로 걷는 오페라 #10 17세기의 이면

  작가란 어떤 사람일까요? 작가의 자격은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출판문화를 기준으로 삼아, 출간 서적의 저자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누군가 말했듯이, 바로 지금 누군가 읽을 수 있는,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작가일 것입니다. 이런 정의라면 서구사회에서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여성으로서 작품을 제 이름으로 발표한 작가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임이 분명합니다. 


  젠더 감수성 관점에서 ‘오페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성들에게 극히 제한적이었던, 당대의 법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대해 자주 언급하게 되지만, 모든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불행하게 수동적으로 살아갔다고 바라보는 시각은 현실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항상 예상을 넘어 복잡하기 마련이죠. 성별이라는 기준만으로 개인의 사회적 현실을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기질적인 특성, 가족이나 주변인의 성향, 재산이나 지위 등 수없이 많은 변수가 개입되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성별이 권리를 제한하는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출판 분야로 제한해서 생각해 본다면, 17세기의 유럽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이름을 내걸고 출판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할 만한 것이었으니까요. 사실상 당대 언론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출판 분야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지 못했던 현실은 대단히 중요한 권리를 배제당한 것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사회적 고정관념이나 권리의 제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17세기까지 여성에게는 극히 제한적이었던 작가로서의 삶을 개척해 나간 용기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페라 너머의 영역이자 당대의 오페라를 낳은 사회적 배경으로서, 시대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될 것입니다.      


  서구 문화에 서정시의 발자취를 남긴 시인사포    

 

사포, 쥴스 조셉 르페브르, 19C


  서구 문화에서 여성 작가를 논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전후, 그리스의 레스보스섬에서 나고 자라, 내면의 섬세한 정서를 아름다운 시어로 남긴 서정시의 대가, 사포(Σαπφώ, Sappho)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포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서구 문학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어, 시 ‘아프로디테 찬가’, 한 편만이 온전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2014년에는 ‘형제’라는 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사포의 시는 절절한 슬픔의 감성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 많은데, 대부분 노래로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감각적으로 그려진 사랑의 대상이 여성인 경우가 많아, 그가 태어난 레스보스섬으로부터 유래하여 '레즈비언' 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레즈비언이란 즉, 레스보스 사람이라는 의미였던 것이죠.  


사포를 따르는 제자들, 토마스 랄프 스펜스, 1896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추방된 기록이 있습니다. 학교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노래와 춤, 시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를 추종하는 모종의 학파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연인의 죽음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해 레프카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가 실제로 존재한 시인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서, 고전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정리한 ‘데스티모니아’라는 서적이 전해집니다. 이 역시 오래된 사료로서 충분히 고증되지는 못했습니다만, 당대에 이미 호메로스와 함께 언급될 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쌓았기에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은 서구 문학의 역사에서 최초로 서정시의 영역을 개척한 작가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중세 이후에도 많은 화가들이 사포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은 것을 보면 서구 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가 그리는 영웅적인 인간의 삶을 넘어, 영혼의 고결함에서 솟아오른 깊은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된 내면의 슬픔을 그려낸 사포의 작가로서의 발자취는, 서구 문학의 역사에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음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인 맥락에 놓인 인간이라는 씨실과 교차하며 인간의 내면을 투영하는 날실의 존재를 발견하고 구현한 대작가로서 사포의 이름은 이후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사포의 죽음, 피에르 오귀스탱 바플라르, 1819


  근대적 의미의 작가그 탄생


  중세 종교 시대에도 여성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집단을 만들어 음유시인으로서 살아가던 여성이 존재했습니다. 리라 하나 둘러메고 노랫말을 지어 사람들에게 선보인 작가들은 종교의 굴레, 전쟁의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수 세기 동안, 출판과 교육은 여전히 여성에게 배타적이었습니다. 여성이 작가로서 이름을 올리고 책을 펴내기란 쉽지 않았죠. 묵상과 침묵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 여성의 타고난 미덕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 책을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한 권도 팔리지 않아도 좋다는 용기, 유별한 사람으로 비난받아도 좋다는 도전 의식이 없이는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학식을 갖춘 여성들은 남보다 한 발 앞선 사상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외국의 서적을 번역한 후 익명이나, 남성의 이름으로 펴내는 등의 우회 전술을 선택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가렛 캐번디시와 그의 남편 윌리엄 캐번디스 후작


  하지만 첫걸음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죠. 1666년, 근대적인 의미에서 이름을 남긴 작가가 드디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마가렛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 ‘불타는 세계’리는 유토피아 소설을 남긴 작가입니다. 마가렛 캐번디시는 17세기의 철학자이자, 시인이고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였습니다. 자연과학에도 전문적인 식견이 있었다고 하니 르네상스 시대의 융합 인재였던 셈입니다.     


  부유한 왕당파 집안에서 나고 자라며, 학식을 쌓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1642년 영국 혁명이 일어난 뒤, 왕과 왕비의 최측근 관료로서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윌리엄 캐번디시 후작과 결혼합니다. 당시 파리에서 만난 토머스 홉스, 데카르트 등의 철학자들과 만든 뉴캐슬 모임의 핵심 인물로서 여러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철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타는 세계, 마가렛 캐번디시, 1668


  애초 ‘불타는 세계(The Blazing World)’를 저술하게 된 계기도 근대 자연과학이 태동하던 그 시절, 남성 학자들이 주류로서 과학을 이끌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그 배타성의 잠재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련이 있겠지요. 북극 너머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적인 왕국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불타는 세계’는 17세기의 과학계와 철학계를 최전선에서 이끌어간 학자로서의 정체성과 자신감이 담겨 있습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 이어지는 유럽 사회의 대변혁기에도 여성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큰 변화를 거두지 못합니다. 다만, 여성 작가들은 온갖 어려움에도 대를 이어 새로운 세상을 끊임없이 그려갑니다.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와 같은 작가들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여성의 삶의 조건에 관해, 때로는 인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관해 끝없는 탐구를 보여준 위대한 작가들의 계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입니다만.


'자연 철학의 배경' 표지, 마가렛 캐번디시, 1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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