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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Oct 07. 2023

부르주아 가족의 탄생

뒤로 가는 오페라 #12 오페라 '돈 조반니'의 시대

  1702년, 영국 런던에서는 사무엘 버클리가 최초의 일간지를 창간합니다. 러시아의 아름다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에 탄생했죠. 1715년에는 태양왕으로서 절대군주제를 다진 루이 14세가 죽음을 맞았고, 1733년에는 카리브해에서 영국과 에스파냐가 전쟁에 돌입합니다. 1746년, 프랑스와 영국은 인도에서 전쟁을 벌입니다. 제국주의 경쟁에서 에스파냐의 힘이 떨어지고, 프랑스와 영국의 거센 식민지 경쟁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루이 14세의 초상, 야셍트 리고


  1762년, 혁명의 시대정신을 담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출간됩니다. 1776년에는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지요. 이 두 사건은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엔진이 됩니다. 1786년, 이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사건들의 한복판에서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년 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삼부회 소집에 동의하고, 다시 1년 뒤인 1788년 7월 14일, 시민군에 의한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같은 해 8월 26일, 혁명의 위대한 결과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프랑스 제헌국민의회에 의해 드디어 채택됩니다. 


  혁명의 지향점을 담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계몽주의와 자연법 사상을 기반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양대 기본권, 종교, 출판, 결사의 자유와 같은 근대적 민주주의의 중핵 가치를 고루 담아 봉건적 신분사회 체제로부터 근대적 시민 사회로의 전환을 글자 그대로 ‘선언’합니다.


  모차르트의 1786년 작품 ‘피가로의 결혼’은 흔히 다 폰테 3부작이라 불리는 오페라 연작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와 손을 잡은 모차르트는, 1787년 ‘돈 조반니’를, 1790년에는 ‘코시 판 투테’를 선보였죠. 가히 프랑스혁명의 불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계몽주의가 유럽의 사회체제와 문화를 급격히 변화시켰던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온갖 근대적 사건들이 시대의 정경을 바꾸어 놓았던 시점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들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다시 시대의 변모를 가속시켰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유진 들라크루아, 1830

               

  근대적 가정의 탄생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이라는 동력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절대군주의 시대를 거치며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세력은 점차 구시대의 왕정 체제 아래 득세한 궁정 귀족과 경쟁할 만한 힘을 갖게 됩니다.


  절대 왕정 체제 아래의 귀족들에게 결혼은 신분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계약 관계일 뿐으로, 축첩과 혼외 연애는 오히려 스스로의 힘을 전시하고 사회적 네트워킹을 강화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죠. 궁정 귀족과는 ‘윤리적인’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 대체로 궁정의 귀족보다 상대적인 빈곤 상태에 있는 부르주아에게 부부 사이의 애정을 기반한 일부일처제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부부와 적자를 중심으로 한 가정, 사회체제 유지를 위한 기본 단위이자, 경제 단위라 할 수 있는 근대적 가정의 탄생은 시대적인 요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근대적 가정의 ‘적자 세습’은, 산업혁명 이후 빠르게 부를 축적해 나간 부르주아 세력들에게 부의 공고한 구축을 위한 절대적인 필요조건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코코 복장을 한 커플의 대화


  여성의 소외       


  근대적 가정의 부부는, 왕정 귀족들의 계약 결혼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두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연애와 혼인’,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물로서 ‘부부애’를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부부’ 사이에서 상호 평등한 권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만합니다만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달랐죠.


  자유연애와 혼인은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용되었을 뿐, 혁명의 과정에서 여성은 정치적, 법적 권리를 가진 주체로 인정되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됩니다.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는 오로지 가부장의 것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죠. 현모양처가 되어 가사를 돌보고 좋은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 부르주아 가정의 여성들에게 최고의 이상적 가치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 인물인 루소가 ‘에밀’을 통해 여성을 가부장의 명령에 따르는 인간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속 여성들이 남성의 유혹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희생자로 그려지거나, 신경질적인 잔소리나 해대는 존재,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극히 시대적인 인식의 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음악의 알레고리, 17C

  

  과학자의 탄생      


  우리에게 위안을 줄 만한 존재는 언제나 그렇듯이 18세기의 유럽 사회에도 살아 숨 쉬고 있었죠.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인사들이 모였던 살롱에서 몇몇 여성들의 존재가 눈에 띄며 조금은 위안을 줍니다만, 여전히 극히 소수의 예외적 사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상당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가문의 자제로서, 가부장인 아버지의 사상이나 인식이 여성의 사회적 성장에 호의적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732년,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물리학 교수가 된 라우라 바시의 사례는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의 성과인지라 더욱 놀랍습니다. 바시는 이탈리아에 뉴튼 물리학을 처음 전파한 인물로, 남편인 주세페 베라티와 더불어 철학 연구와 물리학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과학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자문그룹으로 임명 되기도 했습니다.


  바시로 인해, 볼로냐 학회는 당대 유럽에서 물리학의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과학계에서의 여성 소외와 유리천장을 생각해 볼 때, 명성을 쌓은 과학자로서 18세기를 살다 간 바시의 사례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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