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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Sep 27. 2023

13세기에 만난 오늘

뒤로 걷는 오페라#7 쟌니 스키키의 시대

  유럽의 중세. 종교의 심연, 전쟁, 흑사병, 잔혹한 고문 같은 이미지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몽매한 어둠에 갇힌 어떤 시공간으로 막연하게 배치된 세계. 소설, 영화, 드라마 같은 매체들이 그려온 중세의 그림이지요. 


  사료를 통해 한 걸음이라도 중세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면 우리가 기대한 중세는 거기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기 이후 서구 사회가 개념화한 ‘시민’은 그 자리에 없으나, 오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인간'이 그곳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젠더’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놀라곤 합니다. 오늘의 인간관계는 중세 시대의 유럽에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조금은 다른 양상일지라도 오늘의 문제는 거기에도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좀 더 암울하게 말한다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적어도 ‘젠더’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비슷한 양상의 문제가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권리의 법제도화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큰 진전이 있었던 것도 맞습니다만.

              

중세 시대의 시장, 아그네스 펠릭스 드 비녜, 1862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신분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소위, 성직자, 기사, 농노와 같은 세습 신분이 존재했습니다. 봉건제도 관점에서 본다면 영주와 농노 간의 극단적인 신분상의 차이가 나타났지요. 예를 들어 농노가 결혼할 때 영주가 이를 승인하면서 초야를 치르는 ‘초야권’ 같은 것을 보면 그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신부는 철저히 사회적 약속을 위한 거래 가능한 대상물이었음도 알 수 있죠.


  이스라엘 학자 슐람미스 샤하르는 ‘제4신분’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의 지위는 성직자, 기사, 농노에 이어 신분의 위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음을 설파하기도 했습니다. 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종교와 사회의 이중적인 가부장제도 아래서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회적인 일에 종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외적으로 귀족 가문의 여성 중에서는 학식을 쌓거나, 영지를 경영하는 등의 자유를 경험한 이들이 존재했죠.


  이전 장에서 함께 살펴본 푸치니의 오페라 ‘쟌니 스키키’는 1299년의 피렌체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게르만의 이동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를 중세로 보기도 하지만, 시야를 넓혀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근대 사회로 옮겨갔다고 생각하면 중세기는 좀 더 길어집니다. 쟌니 스키키의 무대는 이런 중세기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1300년을 전후로 한 이야기입니다. 


  중세 시대의 모든 삶을 하나의 챕터 안에서 다루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만, 오페라 쟌니 스키키와 관련해 적어도 중세기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두 개의 열쇠말로 중세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앙리 3세와 캐더린 드 메디치의 결혼 지참금, 앙트완느 카롱, 1562

           

종교와 전쟁중세의 이름       


  중세를 다스린 것은 사실상 교회입니다. 교회법을 통해 사회적 삶을 관장했죠. 교회의 여성관이 매우 암울했음은 이전에도 서술했습니다만, 대체로 여성을 ‘아이 만드는 기계’, ‘악마로 이끌어가는 통로’로 여기고, 심지어 가부장인 남편에게 여성을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교회법으로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브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마리아를 숭배하는 교회의 이념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고정관념을 강화할 뿐이었습니다.


  봉건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사회는 더욱 유연성을 잃고 권위적인 구조를 강화하며 여성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겼습니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그 자체로 여성에게는 예외 없이 특별한 고난이었지요.


  오페라 ‘쟌니 스키키’의 이야기에는 수도원과 교회에 관한 통렬한 조롱이 담겨 있습니다. 중세를 살다 간 단테는 쟌니 스키키를 지옥으로 보냈습니다만, 19세기의 푸치니는 쟌니 스키키의 기막힌 속임수와 재치가 수도사와 교회마저 골탕 먹이는 모습을 오페라 부파의 흥겨운 분위기에 담아냈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그를 둘러싼 마리아와 요한, 중부 라인 지방의 장인, 1450-1460

  

  마녀사냥 역시 13세기 이후 가장 극단적 형태의 여성 대상 폭력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마녀라고 불려진 이들을 불에 태워 살해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폭력이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마녀사냥은 이미 근대기에 들어선 16세기와 17세기에 서유럽 지역에서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변혁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지점입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 반 에이크, 1434


지참금 보험이 만들어진 시대     


  라울레타가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는 아리아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중세 이탈리아의 신부 지참금 관습이 있습니다. 딸이 결혼하면 신랑에게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내주었는데, 그 규모가 사업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하니 신부의 가족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죠. 전쟁과 흑사병으로 남성 비율이 더 낮아질 때면 더 큰 지참금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상당한 악습이었음은 분명합니다. 


  1425년에는 피렌체 공화국 당국에서, 직접 ‘Mote Delle Doti’라는 공적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딸이 5살이 되면 가입해 7.5년 또는 15년을 불입하면 결혼 시 신랑에게 이자가 붙은 만기 금액을 지참금으로 내주는 제도였다고 합니다. 흥미롭죠? 참으로 실용적인 이탈리아인이라는 생각도 들고, 정말 오늘날의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입니다.


  예술 역사학자 린다 사이들(Linda Seidel)은 세기의 명화로 일컬어지는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가 아내의 지참금을 받기 위해 결혼을 성사시키러 온 남자를 그리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럽 사회에서 지참금 문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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