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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Oct 09. 2023

미안합니다, 초초씨

뒤로 걷는 오페라 #16 막을 내리며

  1904년 나가사키, 우리의 초초씨는 15세의 어린 일본 여성입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제국주의 전쟁에 모든 자원을 쏟고 있었습니다. 1870년, 외국인 거류지가 완성된 후, 나가사키에 주둔한 미군 장교에게는 집과 요리사 같은 편의가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해군 장교 커튼도 일본 정부의 호의에 기꺼이 응합니다. 설사 정식으로 결혼한다 해도 이혼하기 쉬워 문제없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초초씨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얻습니다.              


나비(안나 파블로바를 위한 의상 디자인), 레온 박스트, 1913


  초초씨가 미군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걸게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파괴된 가정, 끔찍한 가난으로 인해 혼자서는 살아갈 방법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죠. 제국주의의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당시의 일본에서 하층민의 딸이거나 그나마 가족조차 잃어 살아갈 방법이 없는 여성들은, 뚜쟁이들에게 속아서 미군의 현지처가 되거나 성매매에 빠지게 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해외로 나가 전쟁을 벌이는 일본군의 위안부로 팔려 가는 경우도 많았죠. 그에 비한다면 처음 보는 외국인과의 결혼은 한결 나은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결혼을 결심한 초초씨는 충심을 다하기 위해 종교도 개종합니다. 온갖 사회적 비난에도 결혼에 충실하고자 노력합니다. 제대로 된 결혼이 아니라면 팔려 온 자신의 처지를 견딜 수 없기에 결혼식도 올리죠. 우리의 예상대로 결혼식이 끝난 후 얼마 안 되어 떠난 커튼은 3년이 지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연락도 없습니다. 초초씨는 커튼의 아들을 낳고 커튼의 부인으로서 그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커튼이 나가사키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미국인 부인과 함께였죠. 배가 도착한 날, 초초씨는 밤새 커튼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바로 이 기다림의 장면에 허밍 코러스가 어두운 무대 위로 조용히 흐릅니다. 나가사키 항구의 병사들이 부르는 노래인지, 항구에서 일하는 이들이 밤을 맞이하는 노래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고아한 선율만은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명을 불러일으키죠.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 커튼은 아들을 되찾기 위해 초초씨를 찾지만, 차마 대면할 용기는 없습니다. 집으로 찾아온 커튼의 부인에게 초초씨는 커튼이 직접 자신을 찾아오면 아들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의 시간. 단도를 꺼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작곡가 푸치니가 무슨 이유로 이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적어도 초초씨가 겪게 된 일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시절 일본에, 아니, 다시, 그 일본으로 인해 수없이 희생된, 우리나라, 중국, 동남아시아, 저 멀리 네덜란드의 초초씨가 겪은 모진 폭력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뿐인가요. 서구사회의 수많은 비올레타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버킹험 궁전 밖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1914


  세상의 모든 나비를 향해

    

  오페라를 젠더 감수성의 시각으로 돌아보는 이 작은 프로젝트는 나비부인의 이야기를 끝으로 마감하려고 합니다. 오페라 속 편향된 시선, 부적절한 설정이나 가사,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한 작곡가나 대본 작가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이제 여러분들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오페라의 형식을 처음 완성한 이들이 생각했듯이 오페라는 언어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음악의 형태를 완성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장르입니다. 청중들이 좋아할 만한 극적인 이야기 틀 안에서, 당대의 사람들, 극적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삶의 정경을 조금은 과장되게, 조금은 상징적으로 그려내게 마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젠더 감수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한없이 당황스러운 장면들이 드러나기 마련이죠. 그 부적절함은 대체로 시대적 인식의 산물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이래로 서양 문화에 끝없이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Misogyny)의 흔적들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되어 서구사회의 구조적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풍경 속에서 서있는 여성과 앉아있는 여성, 피에르 어귀스트 르느와르, 1919


   그럼에도 긴 역사를 거치며 작은 걸음이라도 진전이 있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목소리를 낸 여성들이 존재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연구를 시작한 과학자들이 있었고, 자신의 이름을 버려서라도 창작물을 발표한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작은 폭력들 속에서도 끝까지 자존감을 잃지 않은 이들은 잘못된 관행에 반기를 들고 피케팅을 하고 행진을 벌였습니다. 적어도 제자리를 지키며 물러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그의 참을성 있는 동료들은 거의 100년에 가까운 노력 끝에 결국 여성 참정권을 확보했습니다.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사회구조를 바꾸어 낸 가장 의미 있는 성과 중의 하나입니다.


  또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한 남성들 역시 많았음을 확인하며 작은 희망을 나누기도 합니다. ‘라 트라비아타’를 세상에 내놓은 베르디는 코티잔의 비극적인 삶과 고난에 대한 깊은 공감을 작품 안에서 보여줍니다. 비올레타의 삶을 비난하기 위한 작품이 아닙니다.                


애니스 케네이와 크리스티 아벨


  해리엇 테일러 밀과 그의 남편 존 스튜어트 밀은 1896년 ‘여성의 종속’을 통해 인간이 도덕적 각성과 지성을 통해 자립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전망과 함께,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아야 하며 그러므로 당연한 이치로 여성 역시 참정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가는 한 민족, 한 문명의 발전 정도를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선언하기도 했지요. 책을 발표하면서 존 스튜어트 밀은 해리엇을 공저자로서 넣어야 한다고 했지만, 해리엇이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성 작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책의 존재감이 희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가 에밀 졸라 역시 1883년의 작품 ‘여인들의 행복’을 통해, 백화점이라는 20세기 소비 문명의 화려한 성채 뒤로, 제대로 평가받지도, 대우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노동 현실이 존재함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오페라 속 장면들을 시대의 문화 조류와 사상을 담은 증거로 삼아, 시대의 이야기를 젠더 감수성의 관점에서 풀어보려는 시도로 만들어졌습니다. 미디어와 장르의 범람 속에서 오늘날 오페라는 더 이상 문화의 최전선에 서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400년 이상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장르입니다. 앞으로도 그 사랑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초초씨의 삶이 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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