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영화교육 어젠더 #2
폭력의 언어들, 폭력의 현실
복도는 지나치는 아이들의 고함으로 소란스럽다. 분명 에너지는 넘쳐나는데,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생각의 소통으로 이어지는 평서체 언어는 그곳에 없다. 때로는 독립적인 감탄사처럼, 때로는 어두나 어미에 붙는 접사처럼, ‘보통 말’에 달라붙은 욕지거리들이 귓가를 두드린다.
“와, 이게 무슨 말이지? 누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니?”
과장된 톤으로 따지고 들어야 폭풍 같은 언어의 폭력을 스스로 감지한다.
“덕분에 샘 전전두엽 기능이 손상됐어!”
욕설과 같은 언어적 학대가 인간의 전전두엽 가지돌기 회로를 악화시킨다는 주장은 상당히 과학적인 울림을 지닌다. 전전두엽 걱정은 어디까지나 손에 잡히는 명확한 증거를 선호하는 아이들의 취향을 따른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들의 귀를 열어줄 말을 찾아냈다.
폭력은 학교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우리가 학교폭력이라고 부르는 사례들로 국한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그저 이렇게 잠시 복도에 서 있기만 해도, 즐거운 놀이가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번지는 광경을 만나곤 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욕설과 감탄사의 행렬이 이어진다.
2024년의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학생의 2.1%가 학교폭력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고, 이 중 언어폭력이 39.4%를 차지한다. 신체폭력은 15.5%, 사이버폭력은 7.4%를 차지하며, 집단 따돌림과 성폭력이 그 뒤를 잇는다.
사이버폭력과 성폭력, 혹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디지털 성폭력의 비율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체감할 정도로 자주 발생하는 폭력이다.
물론, 폭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밝은 교류, 주고받는 인사들, 에너지 넘치는 대화, 심지어 가끔은 지적인 대화들도 오간다. 하지만 폭력은 예상보다 더 자주 발생한다. 다만, 이곳에 선 우리 모두는 소위 ‘학교폭력의 하한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선’을 넘지 말아야 함을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어린 학생들도 정확히 알고 있다.
폭력예방교육 수업을 진행해 보면, 자주 놀라게 된다.
초등학교 3~4학년 아이들이,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특히 신고가 이루어지고 학교폭력 전담기구가 열리게 되면 어떤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다. 절차 하나하나를 정확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까지 가게 되면 큰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도 피곤한 일은 피해야 하고, 더 큰 대가가 따를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가 새겨져 있다. 지난 수년 동안 필수적으로 해마다 학교폭력예방교육을 시행하고 폭력 발생 시 대응할 매뉴얼을 구축했지만 우리가 얻은 것은 안타깝게도 고작 이런 정도다.
“야, 선생님이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자.”
“그래그래, 너도 그렇게 말해.”
학생들이 떼 지어 다니며 공론의 장을 펼치는 것을 목격한다. 저것은 그야말로 상당히 법적인 거래가 아닌가. 폭력의 가이드라인을 서로 조정하는 현장이다. 방금 몸싸움을 벌인 아이들이라고 믿기 어려운 농밀한 거래가 눈앞에서 이루어진다.
“너희들 뭐 하고 있니?”
제지에 나서보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빛의 속도로 빠르다. 그들만의 상호 협정은 즉시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인권의 의미, 폭력의 심각성을 체화하는 것보다 폭력의 하한선을 넘지 않는 방법, 넘었더라도 조용히 타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더 빠름을 그들은 알아챘다. 우리 공동체의 교육 시스템은 미묘하게 틀어진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마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으나.
영화적 현실, 현실적 영화
영화 속에서 폭력을 재현하는 것, 그 위험성은 말할 나위 없이 크다. 그럼에도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청소년의 극악무도한 폭력을 있는 그대로 그린 작품을 꼽으라면 셀 수 없을 정도다.
폭력을 집행하는 장면을 잔혹하게 묘사하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를 괴롭히기 위해 학교에서 담뱃불이나 고데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연령 제한만으로 초등학생들이 보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청소년의 폭력을 다룬 영화 중,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영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었다. 원테이크 촬영 전략을 통해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현실을 재현한 드라마였지만, 살인이라는 폭력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영화 속 CCTV 장면으로 일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스토리 진행 과정의 일부일 뿐 직접 묘사는 최대한 자제한 흔적이 느껴진다. 영국 정부가 중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이 작품을 보도록 권고할 만하다. 애초 영화의 진행 방식과 접근 전략 자체가 폭력 노출이나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것이 아니다.
관객을 인물의 캐릭터성에 몰입시키지 않고, 대신 평범한 노동계급 가족, 부모 세대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폭력, 그 현실과 기원을 ‘바로 지금’의 시제와 속도로 그려낸다.
그 안에서 관객은 평범한 노동계급 부모가 ‘중학생 아들의 세계’에 얼마나 무지한지, 아들의 머릿속 현실이 지금 이곳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경찰 아버지를 둔 아이가 학교폭력에 얼마나 쉽게 노출되는지, 그리고 요즘 아이들의 SNS 문법이 얼마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소통 수단인지를 확인한다.
원테이크 촬영은 현장감과 심리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여성 심리 전문가와 만 13세, 소위 ‘인셀’ 남자아이의 세계가 부딪혔을 때 관객은 성인/청소년, 전문가/내담자의 권력관계가 미묘하게 심리적 접근전을 펼치며 부딪히다가, 자주 속절없이 역전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탁월한 현실 묘사다.
물리적 폭력에 대한 관음증을 버리더라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장면이 그려질 수 있음을 우리는 〈소년의 시간〉을 통해 확인한다. 이 작품은 ‘현실적인 영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좋은 해답이다.
인터넷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 안에서,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이 창조한 스스로를 ‘인셀’이라 부르는 느슨한 네트워크의 위험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보다 더 나은 묘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 창작 동아리에서 학교폭력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폭력은 우리 아이들의 가장 첨예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고된 폭력, 법적 판단을 받아야 하는 폭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폭력의 악순환이 오늘, 그들의 현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폭력의 내면에는 가정이 있다.
양육자의 삶이 고단하고 불안할수록, 아이들과의 소통은 어려워지고, 파괴적인 폭력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가정 내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통계적으로 아동학대에 이중 노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학대가 학교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 청소년 대상 가정폭력과 학대에 노출 경험과 청소년 학교폭력의 상관관계 메타분석(2018)』 논문은, 가정폭력 목격·학대와 학교폭력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확인했다. 특히 신체적·정서적·언어적 학대와 방임을 경험한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더욱 취약해, 또래를 괴롭히거나 괴롭힘을 당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학교폭력의 원인을 양육자의 몫으로 돌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정환경과 학교 내 역학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학교폭력 이야기를 생각하고, 정리하고, 드라마화하는 동안, 아이들은 전력적으로 빠른 길을 선택하는 매너리즘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확신으로 프로젝트를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