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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경님 May 30. 2023

21. “이모, 엄마 죽었어요?”

청각장애 엄마의 이야기 

2017년 7월 13일 와우 수술 진행   


입원은 3박 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엄마의 부재를 미리 느끼나 보다. 


12일 입원을 앞두고 세 아이들의 컨디션 난조가 시작되었다.

 9살 첫째는 축축 쳐지는 고열이 시작되었고, 7살 둘째는 원인불명 알레르기가 온몸에 올라왔는데 피부가 무섭게 부풀어 올라 오밤중에 응급실을 다녀오고, 5살 셋째는 한여름에 목감기가 와서 고생이었다. 

아이들 상태로 수술을 미루기에는 큰 수술이었기에 여동생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까지 가는 약 2시간의 시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이 제일 무섭지 그전까지는 오히려 무덤덤한 기분이랄까? 입원 수속을 밟고 호실을 배정받았다. 얼마 되지 않는 3박 4일의 짐을 정리하고 병원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그때서야 뒤숭숭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서 출산 다음으로 가장 중요하고 큰 이벤트일 것이었다. 


실제로 내 삶은 인공와우 전과 후가 아주 달라졌고 분명 쉽지 않은 힘든 선택이었지만 인공와우 덕분에 지금은 너무 건강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      


입원 첫날 저녁 식사로 돈가스가 나왔다. 저녁 먹고 수술 부위 이발을 할 거라고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저녁 식사로 나온 돈가스를 보면서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에는 다른 거 먹을걸!’ 하고 아쉬워했다. 그날 점심 저녁 두 끼를 연달아 돈가스를 먹게 되어서 정말 아쉬웠던지라 아직도 그때의 메뉴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수술 부위 이발을 하는 것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돈가스를 정말 천천히 씹었다. 이 식사 시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씹고 또 씹고 정말 한참 후에 삼켰다. 식사 중에 간호사 선생님이 오시면 “어? 저 아직 식사 안 끝났는데...” 하려고 멘트까지 연습하면서 천천히 씹었다. 그렇게 천천히 씹었는데도 간호사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내 저녁식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돈가스 맛이 어떤지, 배가 부른 지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마치 ‘화가 난 관리자가 곧 들어와서 나를 다그칠 것만 같은’ 불편한 감정이 지속되었다. 내 병실의 문이 열리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똑똑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초록색 넓은 면보자기(소독포라고도 불린다)와 가위 그리고 이발기를 들고 들어오셨다.     

 

“어 선생님 잠시만요.. 얼마큼 깎아요?”   

  

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여기서 여기까지 정도라며 손으로 알려주셨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최대한 적게 깎아주세요..”      


주룩.      


결국 고여있던 눈물이 왈칵 터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청력이 조금 더 좋은 왼쪽 귀를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조금 더 좋은 예후를 위해서 신경이 조금이라도 좋은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왼쪽 귀 수술 예정 부분 머리를 밀기 위해서 나는 오른쪽 귀를 침대에 대고 옆자세로 누웠고 눈물은 계속 흘렀다. 

담당 간호사 선생님은 내 눈물이 안쓰러웠던 걸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정말 조금 깎을 거라서 티도 안 나고 금방 자랄 거예요~” 

그 위로에 내 눈물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이발기가 두피를 지나갈 때마다 나의 지난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힘듦과 두려움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발기의 윙~ 하는 작은 진동소리는 ‘결국 수술을 하게 되는구나’ 하는 어떤 체념의 말처럼 들렸다. 

내 마음은 깊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가라앉았다. 

윙 소리가 울릴때마다 듣지 못 해 난감했던 상황들, 듣지 못 해 얼굴이 달아올랐던 피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이제는 괜찮아질거라는 위로 같은, 그러면서도 아팠던 마음이 여전히 치유되지 못 해 아리는 듯한 양가감정이 느껴졌다.

 

아이들을 위해 한 번에 결정한 수술이었지만 아이들 생각만으로 힘을 내기엔 불확실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인공와우를 하고 얼마나 잘 듣는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혹시나 실패의 두려움이 너무 컸다.     


부분 이발은 금방 끝났고, 그 짧은 시간에 내 눈은 발갛게 부어올랐다. 


이발 한 부분을 사진 찍어 가족들에게 전송했다. 

사진을 본 여동생도 속상함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동안 듣지 못하는 답답함에 서로가 힘들고 안쓰러웠던 감정에 이발한 사진이 촉매제가 된 듯했다.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고 다음 날 오전 일찍 수술실로 들어갔다. 

세 아이 제왕절개 외에 처음 진행하는 수술이었다. 수술실은 온통 하얗고 춥고 생각보다 좁았다. 나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위험한 수술인데 이 공간에서 이러한 장비만으로 내가 안전하게 수술받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모든 수술이 그렇듯이 공포에 떨기 무섭게 레드썬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날 흔들어 깨웠고 부축을 받아 병실까지 두 발로 걸어 이동하였다. 

인공와우 수술을 하고 나면 호빵붕대라고 불리는 처치를 받는다. 호빵붕대 때문에 머리가 무거운 건지 수술 때문에 머리가 무거운 건지 침대에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다.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임플란트 부분에서 욱신 화끈 따끔 통증이 끊임없이 느껴졌고 이명도 더 심해졌다. 머리가 울리니 말을 하는 것조차도 너무 힘에 부쳤고 계속 잠에 취하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수술 이틀 째, 아이들이 병문안을 왔다. 여전히 나는 이명과 머리의 통증으로 말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였고 엄마의 아픈 모습과 호빵 붕대가 낯설었던 아이들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엄마를 어색하니, 여동생이 막내에게 뽀뽀라도 해주라고 말을 건넸다.


엄마 껌딱지인 5살 셋째 딸은 내 손등에 살포시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런데도 미동이 없자 옆에 있는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 엄마 죽었어요?”  


                  


수술 후 6일 차에 실밥을 제거했다. 사진으로 처음 본 내 수술자국에 또 울컥할 뻔했으나, 이상하리만큼 수술 후에 마음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수술 예후에 집중하고 준비해야 했다. 지나간 시간에 나를 안쓰러워하고 가엾게 여길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 후 약 6년이 지난 지금도 흉터가 눈에 보일 정도로 남아있는데 나는 안 보여서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나저나 벌써 인공와우 6년 차라니.. 새로운 와우를 위한 적금을 빨리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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