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엣 I : 얇아진 초록

by DL

집안을 정리했다.


쓸모를 다하고 구석에 방치된, 오래된 물건들을 버렸다.


​옷, 책, 잡지, 그리고 옆구리 깨진 캐리어 등등.

거실 바닥이 쓰이지 않을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다.



몇 시간에 걸친 작업의 결과는 지난 기억들을 불러온다.


한 번도 읽지 않은 잡지를 시작으로 한번 더 필터링을

거쳐, 다시는 꺼내지 않을 물건들을 추려 봉투에 담는다.


많다.


​도대체 언제 구입했는지 모르는 물건들이

봉투로 엉켜 들어가 부풀게 한다.


가끔씩 들어가는 미지의 공간에 몸을 접어 침투하는 게 두려워 피했었는데, 막상 헤집고 들어가 펼쳐놓으니 널브러져 있는 시간들을 분류하는 일에 자꾸만 손이 멈춘다.


​과감하자


이 감정들을 처리해야 내일 또 비슷한 크기의

‘가지고 싶은 마음’을 담을 수 있다.


버리자. 뒤돌아보지 말고.



​그날 저녁, 새로운 침구류를 주문했다.

다음날 퇴근 후 집에 들어오니, 깨끗한 이불이 침대를

덮고 있었다.


​포근하고 푹신한 내피가 무게감 있는 외피와 어우러져 공중에 펼쳐지는 체공 시간이 꽤 길다.


그 안에 살짝 들어가 보니, 밖의 세계와 단절된 소리가

‘뽀삭’이란 단어로 구체화된다.


​그렇게 잠시 누워 있다가 거실로 나갔다.

창문과 테이블, 액자들, 그리고 장신거울 밑의 넓은 러그.


​밖으로 나갔다.


침구류를 분리해 넣을 수 있는,

입을 크게 벌린 직사각형의 철제 수거함이 보인다.


입 밖으로 녹색 솜이불이 반쯤 튀어나와 있다.


​나의 빠른 몸동작에 앞을 지나가는 옆동 아저씨가

서슴으며 길을 비켜 주신다.


뿌연 먼지와 약간의 쇠맛이 묻은 녹색 이불을 머리부터 무릎까지 뒤집어쓴 나의 위상을 내가 직접 보았다면, 귀찮음을 이기고 관리실로 걸어 들어갔을지 모르겠다.



다시 구 침구류를 거실로 데려왔다.


듬성듬성 실밥이 터진 유연한 천들이 바닥을 초록으로

만들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세탁기에서

고주파의 깔끔한 음 두 개가 울린다.


두 번 반복된다.


​체류 시간이 긴 새 이불을 덮고, 돌돌 말린 녹색 천—구체적으로는 반 정도 남은 솜을 안고 있는 연두색 직물-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중간에 눈이 떴지만,

그 신호를 무시하고 다시 잠들었다


​몇 년 전에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불이,

지금은 얇은 두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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