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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모쌤 손정화 Jun 27. 2024

요즘 남편은 말 수가 늘었다!

퇴근 길 보이는 그것들 만큼!

나는 매일 나와 싸운다.

특히 퇴근해서 집에 들어서는 순간 싸움이 시작된다.

한동안 퇴근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밥을 차렸다.

내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착한 내가 아닌데...

그렇게 헌신하는 스타일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갔다. 그 열심은! 착함은!

국도 열심히 끓이고, 반찬도 열심히 하고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집으로 오는 길에 순댓국을 사 오거나 부대찌개 밀키트를 사 왔다. 뼈해장국을 포장해 왔다.

기껏 끓이면 미역국! 그것도 고기도 뭣도 넣지 않은!

북엇국! 김치찌개!

이 정도로 끝났다.


한번 손을 놓은 살림은 매 끼니를 해결하려고 싱크대 앞에 설 때마다 부글부글 속을 긁었다.

저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자기 몸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병들었으면서! 게다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었어! 무슨 훈장 받은 것도 아니고 뭐가 저리 당당하지? 왜 저 사람은 사는 내내 저리 당당하지?...

끝이 없는 비방이 속에서 들끓었다.

내가 이렇게나 악한가? 싶을 정도로!

입으로 내뱉는 순간 독화살이 되어 나에게 날아올 걸 알기 때문에 정말 죽을힘을 다해 참아냈다.


만약 내가

"여보는"이라는 말만 입에 담아도 그다음 말을 어떻게 아는지...

"차려주지 마요! 누가 밥 차려달래요? 그렇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오히려 내 속이 더 검게 타버릴 말이 돌아올 걸 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요즘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여보 나 왔어요"라고 말하고 "나 좀 쉬게요"한다.

그리고 잠시 쉰다.

어느 정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자신이 들 때

"여보 우리 밥 먹을까요?" 한다.

남편은 한 동안 내가 출근한 후 설거지를 해 놓았다.

남편이 해 놓은 설거지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꾹 참았는데 남편은 귀신이다.

그 이후로 설거지가 되어있지 않은 싱크대를 마주한다.


오늘도 설거지가 쌓여있는 만큼 내 마음도 지저분해지는 것을 느끼며 설거지를 했다.

아침 먹은 것 그대로다!

사실 나는 설거지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그래도 독화살로 변하지 않을 말을 건네봤다.

"여보! 여보도 나처럼 착한 부인 없다고 생각하죠? 나는 여보가 가끔은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줬으면 좋겠어요. 미안함을 표현해 주고!"


사위가 암을 진단받고 집에 있어 매 끼니를 책임져야 하는 딸을 안쓰러워하시며 하신 말이 있었다.

"너까지 엄마처럼 살지 마! 자기가 알아서 먹으라고 해"

그때 내가 엄마께 말씀드렸다.

"엄마 나는 감사해요. ㅇ서방이 아픈 건 마음 아프지만 그 바람에 세끼를 꼬박꼬박 제시간에 먹잖아요!"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려고 말씀드린 것이었지만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설거지를 하며 나에게 되뇌었다.

'이건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내가 밥을 먹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남편이 없다면 난 분명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할 것이고, 남편이 없다면 난 분명 저녁을 대충 때울 거였다.

남편이 술에 정신이 없었을 때!

방금 밥을 먹었는데 "밥 먹자!" 하며 알코올 치매 증상을 보였을 때에도

"여보 기억이 안 나나 본데 여보 방금 밥 먹었거든요"하면 남편은 이렇게 말했었다.

"여보 밥 먹이려고 그러지!"


그렇게 설거지를 마치고 오늘 저녁에는 삼겹살을 구웠다.

삼겹살을 집에서 구울 때 버섯, 양파, 가지를 큼직하게 썰어 함께 구우면 기름도 튀지 않고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물론 삼겹살 기름이 몸에 좋지는 않지만..


"여보 고기를 내가 다 먹었나?"

설거지를 하며 건넨 말에 컨디션 좋은 남편의 말이 정겨웠다.

"고기가 있었어?"

남편은 사실 말장난을 무지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든 말로 웃겨보려는 사람!

그게 남편이다.


삼겹살을 술을 찾지 않고 먹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남편이다.

"여보 어젯밤에 여보 나갔다가 오니까 너무 힘들어하더라고요. 오늘은 나가지 마요"

내 말 뜻을 아는 남편은 방금 "아! 오늘 쓰레기 버려야 하는데 아깝네" 하며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쓰레기 버리고 올게요"가 아니라 다행이다.


엄마는 아빠가 술을 한 잔 드셔야 말씀을 하셔서 저녁마다 장 보실 때 소주를 한 병씩 사 오셨단다.

요즘 남편은 말 수가 늘었다.

퇴근길 내 눈에 보인 줄 세워 놓은 빈 막걸리 병만큼!


남편이 꼭꼭 감춰둔 돈이 어디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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