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생뚱맞고 무료하다. 휴일이니 푹 자야겠다는 잠들기 전의 생각과 너무 다르니, 우습기도 하다. 나이가 드니 새벽잠이 없어져 간다. 의식이 언제부터인지 이 시간부터 명료해진다.수면의 질이 떨어져 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노인분들이 그렇게 부지런하게 새벽부터 약수터에 모이는 이유를 이제는 알듯도 하다. 요즘은 좀 뜸했는데, 가끔 아침운동도 할 겸 체육공원이 조성된 뒷산의 약수터에 가면, 늘 노인분들 차지였다. 나도 속절없이 그렇게 세월이 채워졌구나 싶어, 떨치고 일어서 화장실로 간다.
거울을 본다. 머리가 벌써 물들일 때가 됐다. 세월의 갈피가 허옇게 피어오르고 있다. 사실 이미 백발 된 지는 오래되었다. 집안 내력은 머리카락이 새치에서 흰머리로의 이행을 이른 나이에 잡고 있다. 살아온 시간만큼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하얗게 본색을 드러낸다. 무기력한 하루를 만들 수 없기에 컬러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아직 현역 직장인이기에 본래의 머리색깔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한다. 나이도 있으니 어지간하면 그냥 다닐 법도 하지만, 내 헤어 스타일은 이십 대에 고정되어 지금껏 바뀌질 않는다.
달반쯤 지날 때가 가장 보기 흉하다. 흰 부분이 밀고 오르니 검게 칠한 나의 페르소나는 맥없이 위로 솟구쳐, 늦가을 갈대처럼 맥없이 흐느적거린다. 원형과 본성이 흰 부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의 심상은 아직 아니라고 소리친다. 외부로 드러나는 나의 표출된 모습은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 이어야 한다.
나는 화장실에서 이를 닦듯이 혼자서 염색을 한다. 누군가에게 내 머리를 맡긴다는 게 어느 순간 귀찮아졌다. 깎는 것은 몰라도 염색은 손수 하게 된다. 염모제와 산화제를 적당한 비율로 휘휘 저으니 다시 검은색에 가까워진다. 짙은 밤색으로 뒤섞어 변신을 시작한다. 혼자서 염색하는 습관은 나를 달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는 위로를 내게 건넨다. 뒷머리는 비닐장갑을 끼고 손가락을 움직여 비벼댄다.
한 올 한 올 구석구석 정성껏 빗질을 하다 보면, 지난 시간을 감추기에 올백머리가 되어갈 때면, 흡족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한 두어 시간 이런저런 짓을 하다 보면 머리가 새카맣게 물들어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것이 거울에 비치어 머리를 감고, 다듬어 2:8 비율의 빗질을 하고 나서야 외출을 하게 된다.
염색은 어쩌면 나를 이전의 나로 되돌리기 위한 안간힘 일 것이다. 그렇다고 머리색깔 만으로 이전의 나로 돌아간다는 착각은 하지 않는다. 아직은 늙어간다는 외모평가를 받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 일 것이다. 다행히 머리카락이 빠지진 않아 모자를 쓰지 않는다. 빗에 무스를 조금 묻히고, 앞머리를 S자 형으로 만들어 오른쪽으로 돌려 스프레이로 마무리를 한다. 늘 같은 형태의 머리모양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만물이 생장하는 봄이 나무의 빛깔을 연초록으로 뒤덮고 있다. 지난겨울 동안 거무죽죽하던 나무는 다시 새로운 녹음의 색깔을 되찾아 간다. 나의 염색이 그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머리의 색만이 아닌, 내적 충만을 이루고자 열심히 써본다. 시간의 흐름에 떠내려가, 잿빛으로 물든 가슴을 다시 꿈꾸는 녹색으로 바꾸려 한다. 비록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 하지만 무언가 하려는, 나 자신이 기특해지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