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키너 상자 속 세상

내가 모르는 나를 찾아서 2

by 포레스임
결국 인간은 우리의 바램만큼 자유롭거나 자율적이지 못하다.오히려 기꺼이 복종할 통제형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다. 《존엄과 자유를 넘어서》 B.F 스키너

사람은 나고 자라서 생업을 영위하기까지, 수많은 관문을 거쳐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나 또한 돌이켜보면 굽이굽이 사연이 참 많았다. 나이 스물이 되자 군입대를 하였다. 훈련소 시절부터 군대는 부적강화(당연한 것의 보상물)에 따른, 행동주의 실험장이었다. 한 모금의 물, 한 끼의 식사, 10분간의 휴식 등, 입대 전의 당연하고 사소한 모든 것이 보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누구나 겪는 군 생활이지만, 순간순간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장애가 참 많았던 시절이었다.



제대를 하고 첫 직업을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시작을 하였다. 사무실엔 큼직한 막대그래프가 정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범한 직업 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각자도생'이란 표현이 어울렸다. 능력에 따른 성과급이 당연시되는 직업이었다. 매월 계약과 출고에 따라 차별지급되는 급여는 나를 흥분시켰다.

고정적인 급여이긴 하나, 실적비율에 따라 대우를 받는다. 기본급은 거의 미미했고, 판매대수로 급여가 결정되니, 입사 동기들과 자연스레 경쟁의식이 불붙었다. 영업은 냉혹했다. 나름 남들보다 휴일도 잊고 열심히 뛰니 급여도 오르고, 인정도 받았다. 늘 머릿속에는 그래프 생각뿐이었다. 오전 업무는 가망고객과의 약속등으로 분주히 잡고, 계약과 출고 등으로 바쁘게 오후를 보낸 후, 사무실로 복귀하면 그래프의 변동이 있었다.


내 실적 막대가 그대로 멈춰서 있으면 불안한 하루가 저물어갔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실적이 승승장구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결핵성 늑막염, 편히 식사 한 번을 못하고 점심은 가망고객과, 저녁은 눈치껏 반주를 곁들인 실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몸이 망가졌다. 사 년 반 동안의 실적 쌓기는 병원 치료 후 퇴사로 이어졌다.



그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안정된 직업이 필요했다. 나이는 서른을 넘어가고 뭔가에 쫓기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공무원 시험을 염두에 두고 나이제한에서 조금 여유 있는 직종을 택해 책을 봤다. 내 능력대로 일을 하고, 고정되고 조직화된 급여를 받아야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몇 번의 시험을 치르고 지금의 직종에 안착했다. 고정적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급여를 받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벌써 25년째 근무 중이다. 간간이 로또를 산다. 가변적이고 언제 그런 행운이 올지 모르지만 잊지 않고 매주 토요일이면 만 원짜리 한 장을 들고 패턴식으로 여섯 숫자를 응시 정성스럽게 번호를 찍어댄다. 변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확률은 희박하다. 즉, 가변비율에 의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산더미 같은 먹이를 기다린다. 봉급쟁이로 언제 돈을 모아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B.F. 스키너의 상자 안의 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긴 그러니까 서민이라고 하나보다.



내가 살아온 우리 사회는 스키너의 확대판 실험장 같았다. 눈에 보이고 검증가능한 것만이 인정받는다. 학생시절엔 각자의 재능과 가능성은 시험이라는 바로미터 숫자로 증명을 해야 한다. 입시의 관문을 통과하면 줄 세우기가 시작된다. 서열화된 사회, 그 줄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하면, 평생을 낙인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각 세대는 계절이 바뀌듯 변해간다.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이 단 한 번의 시험이라는 입증의 관문에서 울지 않았으면 한다. 다양한 가능성을 믿고 밀어주는 제도가 정착 됐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스키너의 매서운 눈길이 우리의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다.


wallpaperswide.com(그림)

daum백과 어학사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