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벌써 정년퇴직 할 때가 되어간다. 미처 몰랐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이성적 의미의 숫자는 감성을 만나야 실제로 인지를 하게 되는 모양이다.
요즘은 무조건 열심히 걷자는 게 스스로 세운 계획이다. 하루 만보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만 오천보에 육박할 만큼 걸음에 속도도 붙고, 운동효과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하겠다는 나름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더 연습하고 훈련해서 스스로 내면을 다지고, 다짐이 무뎌지지 않으면서, 체력적으로 어느 정도 단계까지 올라와야 가능한 일이다.
600킬로가 넘는 33일 동안의 고행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인내로 해내겠다는 신념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시작을 했다. 학업을 남들처럼 시작하고 졸업하며, 첫 직업을 시작하고, 지금은 정년에 다다라서 또 다른 2막을 준비하려 한다. 그 외에도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시작과 종료가 있었다. 물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후회도 많았고 시작이 무의미할 정도로 방황한 적도 있었다. 끝낼 시점엔 늘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앞섰다. 하지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늘 나를 지배했었다.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를 두고 두발을 움직여 가는 것이다. 가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번민에 휩싸일 것인가, 그런 다음 과연 나는 무엇이 바뀔 것인가. 자못 궁금해진다. 한 번도 그런 극한 환경에 나를 내몰아 본 적이 없다. 사는 동안, 경험한 바로는 주로 그런 것들은 외부적으로 다가왔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직업을 바꾸려 몇 번의 좌절을 겪고, 지금의 직종에 근무하기까지 극한의 번민에 종종 휩싸여, 나는 이미 사막 한가운데를 트레킹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말은 역시 옳았다. 그동안의 삶을 통해 많은 시도와 좌절, 소망, 무심함이 교차하면서, 지금의 순간을 사는 존재로 서있는 것이다.
다시 출발선에 서다
지금의 나이에 이르니 내 신념조차 과연 맞는 것일까, 의심도 해보게 된다.
확신은 위험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나티코 스님의 말은 되새겨봐야 할 가치가 있다. 노력하는 자체는 훌륭하지만, 결과는 바라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게 여정의 단면일 뿐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이, 또 다른 방황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무턱대고 시작한 글쓰기는 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첫 발을 띄었으니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보자는 심사는 무리일 수 있다. 남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렇게 많은 경험과 생각 덩어리들을 잘 풀어내는 것을 보면, 한참을 더 배워야 한다는 조급함이 일곤 한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생각의 깊이가 심연의 늪과 같은 작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북송의 문장가인 구양수의 말처럼 마상, 침상, 측상 중에서 말위에서의 구상은 현대생활에서는 할 수 없으니, 산책 중 글감을 풀어가는 일이 나에겐 맞는다. 문득 넋 놓고 걷다 보면 강렬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내야 할 시점을 맞이하곤 한다. 대신 주제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피곤함은 어쩔 수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마음이 지형학적 구조가 있어, 무의식 상태의 평온함이 저장된 전의식으로 떠오르고, 의식화되어 글감으로 쓰게 되는 것일까. 어느 정도 공감은 된다. 생각의 사이즈가 있다면 말이다. 그 무의식의 사이즈가 언어와 같이 구조화가 된다면, 라캉의 말처럼 풀어낼 이야기가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내 깜냥이 문제다.
걸으며 써보자는 것이 결국 내 결론이다. 침상은 게으르고, 측상은 발작적 배설이니, 마상이 제격일 것이다. 걷고 쓰다 보면 나도 제법 만족할 글이 나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