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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후, 나무마다 싹은 트고 목련은 진다

중년의 단상

by 포레스임

이삼일 동안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올해 들어 비가 안 와 걱정이더니, 연이어 내리니 또 근심이다. 비 마중을 하고 싶어 산책하러 나갔다.


아! 드디어 순환의 시간은 오고야 말았다. 비는 여전히 추적거리며 오고, 목련은 검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고고하게 하얀 주먹 꽃을 피우던 기개는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나무마다 새싹은 새초롬히 오르고 있었다. 목련의 시간은 지고, 온갖 생명은 목마름을 적셨다. 그렇게 봄은 여름으로의 허리 역할을 하나 보다.




환갑을 일 년 몇 개월을 앞두고 보니 시간의 너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래들의 가끔 모임에서 서로를 확인할 때나 체감하는 몸 상태를 인지할 때면 유난히 세월의 그림자가 보이곤 한다. 운동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뇌리에서 가슴으로 전해진다. 다른 무엇도 아닌 현상 유지를 위해, 불룩해진 중년 남자의 아랫배는 근심덩어리다.


박동수를 높여가며 일부러 계단을 오르고, 어쩌다 산을 오를 때, 늘 걱정되는 것이 관절이었다. 조금씩 느껴지는 무릎의 불편함은 용도가 한정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회갑을 못 채우시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나에게 유산소 운동을 권하셨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 체질은 아닌 나를 염려하여서 하신 말씀이리라 생각된다. 작은아버지도 아버지와 같은 중풍 질환으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고 알아차렸다.


심장 승모판협착증, 내 병명은 간단히 말해 심장판막증이다. 몇 년 전 불청객처럼 찾아온 이 질환은 선천적으로 판막의 개폐 활동이 정상인과 달랐다. 모니터로 보이는 내 심장의 판막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허수아비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혈액의 여닫이가 자칫 혈전을 만들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와 아버지를 포함한 형제분들의 증상으로 보아, 나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모든 게 돌고 도는 계절 탓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피조물일 뿐이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으나 나름의 판단으로 퇴원하였다. 삼 개월 정기검진으로 상태를 진단하고, 건강관리를 늘 다짐하곤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나의 시간 배분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별 불만은 없다. 아니 그렇게 살고자 한다. 나는 베이비붐 세대를 일 년 빗겨 난 64년생이다. 올해 들어 만59세가 되니, 퇴직한 선배분들의 근황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물론 건강하게 제2막의 인생을 살아가는 분도 있지만, 전혀 의외의 중병으로 투병 중인 분도 있다. 요즘은 스스로 자기암시처럼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는 성현들의 말씀이 한편 가슴에 와 닿기도 하는 나이다. 내 나이대면 지병 하나쯤은 동반 삼아 세월의 강을 건너는 것도 운치 있다고 자신을 다독여 본다.




여성과는 다르게 남자들의 갱년기 푸념은 술자리에서나 간혹 튀어나온다. 말수가 적고, 과묵해야 한다는 아버지 세대 유습이 아직 한국 남자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현상 때문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치료나 자기 고백이 드물다. 나 역시 몸으로 느끼는 갱년기 증상을 어디서건 함부로 꺼내지 못한다. 정신과 육체가 어지간한 일로는 별 감흥을 못 느낀다는 생각이 지속되는 건 오히려 축복일까?


목련이 일찍 피는 이유가 겨우내 기다림의 피날레인 것처럼, 한세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는 온다. 나 또한 화려하진 않으나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도 맺어 봤으니, 내 생의 몫은 어느정도 채워져 있다.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하필 내가 늙어가는 시기에 고령 사회가 목전에 다다랐다고 여러 매체에서 시급한 사회문제로 드러나는 현실은 좀 억울하다. 부모님 세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하고 보니,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한다. 그러나 어쩌랴 시간은 직선화 경향이 있어 회귀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가도 내 자식은 남아 이 땅에 영원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사임당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기꺼이 거름으로 남아 또 다른 꽃과 열매를 위한 자양분으로 산 것에 만족해야지….


비가 그친 후 바람이 꽤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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