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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Aug 21. 2023

소풍

어느 흐린 날의 소풍

소풍(消風)


가 어디서 시작한 건지 모르겠어요

실타래 같은 기억의 줄기들은 서로 어울려 나를 낯선 곳으로 인도했어요


흐르는 냇물이 어디서 오는지 아리송한 것처럼 내 시간은 이정표가 없었지요


분명한 것은 나 또한 이전의 내가 아니었어요  

활기찬 젊은 시절의 화려한 무늬는 아니지만, 주름지고 아련한 황토색 미소가 얼굴에 흐르고 있었지요 

 

문득 깨달았어요. 시간은 나를 늘 낯선 곳의 앨리스처럼 황당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매력이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라는 걸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이 많죠

자동차를 타고 쌩하니 달리다 보면 사실 아무것도 본 게 없잖아요


천천히 보아도 관심이 없으면 기억에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죠. 재미를 가지려면 좀 다른 생각을 해야겠어요

 

꽃과 바람  그리고 풀향기가 어우러진 봄이 곧 오잖아요.  사라지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시간들이 내 인생이에요  

아주 좋은 소풍이잖아요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첫 소풍이 있으니 참석을 하라고 한다. 중학생때와는 다르게 각자 일아서 태능 유원지로 모이라고 했다. 17살의 청춘은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을 보고팠고, 뭉게구름은 꿈인양 마냥 좋았다.


 도착하니 많은 학교에서 소풍을 와 왁자지껄 했다. 구역별로 학교를 배정했는지, 우리는 모 여자고등학교 바로 옆의 구역에 모여 곁눈질이 바빠졌다. 우리가 오른쪽에 위치하였고, 왼편은 인문계 남고 애들이 자리하였다.


 숲이 우거져 시원한 태능동산은 몇 개의 학교 인원을 품을 만큼 넓었다. 학교마다 이곳으로 소풍을 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벌써 둘러앉아 기타를 켜고 힐끔거리며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분주했다.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날씨가 흐려졌다. 날이 흐린 만큼 내 기억도 흐리다. 경희여고인지 휘경여고인지 지금은 기억에 없는 그 여학교의 학생 중 한 명이 '보니 타일러'의 'It's A Heartache'를 기타 반주에 부르고 있었다.


 마침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빗줄기가 한 방울씩 비치기 시작했다. 숲 속이라 빗줄기는 아직 그녀와 여학생들이 피하기에는 닿지 못하고 있었다. 차마 가까이 가진 못하고, 풋 순정은 노래 가사처럼 광대가 된 기분으로 빗속에 서 있었다.


친구 녀석들 잡아 끌 때까지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를 학원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비슷한 행동만 했다. 노래하다 찡긋거리는 눈매는 나를 알고 있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줄기가 거세져 소풍은 학교별로 파(破) 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잡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나는 우산도 없이 가로수 밑에서 그녀의 노래가사와 선율만 생각했다.


"학원에서 우리 한 번봤죠! 내 노래 괜찮았어요!"


 그녀가 어느새 내 곁으로 비를 피해 버스를 타러 왔다. 나는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235번 버스가 왔다. 그녀가 먼저 오른다. 나와 같은 방향 같았다.

여기저기 뒤지는 폼으로 봐서 버스비를 찾는 것 같았다. 만회심리가 발동했는지 회수권 두 장을 잽싸게 내가 냈다.


"어디까지 가세요!"

나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멀지 않아요! 묵동이요!"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묵묵부답.....,


나는 묵동 정류장에 내렸다. 바보같이.......,

내리는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학원에서 만나면 갚을게요! 잘 들어가요!"

묵동 사는 바보인 나는, 그냥 아무 말도 못 하고 내려서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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