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너를 구출할 수 있을까
우리 부부에게는 야식을 먹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자 쉴 수 있는 시간이다.
문제는 아이가 몇 시에 자느냐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깨어있을 때는 야식을 먹지 않는다. 왜냐? 마음 편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일찍 자는 날은 낮잠을 자지 않은 날이다. 낮잠을 자지 않으면 빠르면 저녁 6시 반이면 잠에 든다. 그럼 내가 퇴근하고 와서 아내와 야식을 조용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낮잠을 잔다면 아이가 자는 시간은 8시 반에서 9시 반 사이다.
야식을 주문하면 대략 1시간 정도 소요가 된다.
8시 반에 아이가 잔다고 가정한다면 7시 반에는 주문을 해야 된다. 아이가 이미 잠이 들고 나서 주문을 하면 늦다. 8시 반에 주문하면 9시 반에 도착한다고 하면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리니 아내가 오늘 아이가 잘 시간을 예측하고 그로부터 한 시간 전에 미리 주문을 해둔다.
예를 들면 아이가 오늘 8시 반에 잘 것 같다고 하면 7시 반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서 주문한다. 그리고 배달 앱에 반드시 메모를 남겨야 한다.
"벨금지!! 아이가 자고 있어요. 벨 누르지 마시고 음식 문 앞에 두고 메시지 남겨주세요"
한 번은 메모 남기는 걸 깜빡해서 배달 기사님이 벨을 누르는 바람에 자는 아이가 깨서 그날 음식은 아이와 함께 먹은 적이 있다.(물론 편히 먹지 못했다) 가끔은 이걸 적었는데도 벨을 누르는 기사님이 있다. 그날은 진짜 깊은 화남을 느낀다. 그렇다고 배달기사님께 뭐라고 해봤자 의미 없다.
주문완료 후 아내에게 보고한다.
족발 주문완료 했어요
오키요. 오늘은 반드시 8시 반 안에 재운다!!
집에 들어가면 아이가 다다다다 뛰어와 나를 반긴다.
아빠!!!!!!
집에 들어온 나를 반기는 아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아이와 놀아준다.
레고면 레고 책 읽기면 책 읽기 일단 뭐든 놀아준다. 8시쯤 되면 슬슬 잘 분위기를 만든다. 일단 거실의 흰 불을 끄고 노란불로 바꾼다. 아내는 세팅을 하기 시작한다. 준비가 완료되면 외친다.
이제 코코낸내할 시간이야~
아이는 싫단다. 아직 더 놀고 싶단다.
몇 번 더 설득을 한다.
어두워졌지요~? 어두워지면 모두 코코낸내할 시간이야~
몇 번의 설득으로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이는 쉽사리 잠에 들지 않는다. 한참을 뒹굴거리고 아빠한테 와서 안겼다가 엄마한테 와서 안겼다가 데굴데굴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8시 15분쯤 되니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문 앞에 주문하신 음식 두고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밖에 나갈 수가 없다.
둘 중 한 사람이 나가는 순간 아이가 반응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길 기다려 본다. 그러나 8시 반이 되어도 8시 45분이 되어도 아이는 잘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밖에서 우리가 야심 차게 준비한 야식은 차갑게 식어만 가고 있다. (미안하다 족발아)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쟤를 어떻게 들고 오지, 얘는 왜 안 자는 거야... 지금이라도 몰래 나가서 가지고 올까... 아 족발은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데 하아... 오늘 하루종일 이 시간만 기다렸는데 아...'
아이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다. (좀 자라!!!)
아이가 살짝 눈을 감았다.
오옷!!
누워있던 나는 살짝 일어나 본다.
그리고는 아이의 반응을 살핀다. 눈은 확실히 감은 상태다. 그러나 손이나 발이 살짝 움직이고 있다. 잠이 온다는 징조 같아 보인다. 이불 바스락 소리가 최대한 적게 나도록 기어 본다. (큰 아이와 나는 바닥에 두꺼운 매트?를 깔고 잔다) 조금 기어도 반응이 없자 아내의 뒤로 살짝 (몸을 던져) 숨었다. 그리고 재빠르게(그러나 소리 없이) 문을 향해 기어가 조금 열려있는 문을 좀 더 열려고 하는 순간
아빠!!
멈칫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싸늘하다. 아이의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침착해야 한다. 일단 멈춰보자. 가만히 있어보자. 애가 벌떡 일어나지만 않으면 된다... 제발...
응, 엄마 여기 있지요~? 코코낸내 하자
아내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말을 살짝 돌리니 아이도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는다.
멈칫했던 나는 문을 몸이 빠져나갈 만큼만 열었다. 아이는 별 반응이 없다. 열리는 문을 보지는 못 했나 보다. 아니면 아내가 잘 커버하고 있는 것이다. 쓱 하고 빠져나가 문 뒤에 살짝 숨어 몸을 일으켜 완전히 섰다. 소리 내지 않고 문을 완전히 닫는다. 무슨 007 작전 같다.
그러나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족발을 아직은 구출할 수 없다.
현관문을 열면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도착한 지 이미 45분이나 지났고 날씨는 춥고 바닥은 더 추운데 저 불쌍한 족발은 어찌하리오 ㅠㅠ
일단 야식을 먹을 큰방으로 들어간다.
세팅을 위해서다. 그러나 큰방은 갓 태어난 신생아, 둘째가 자고 있다.(우리는 잘 때 아이를 하나씩 맨투맨 마크 한다) 이 방도 안심할 순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좀 덜 예민하기에 할만하다.
먹을 장소는 큰방에 있는 옷을 두는 좁디좁은 팬트리(?)다.
둘이 앉으며 꽉 차는 공간인 데다 꽤나 춥다. 일단 미니 테이블을 꺼내 펼친다. 그리고 뒷발을 들고(슬리퍼도 신으면 안 된다) 부엌으로 가 앞접시 두 개와 수저를 챙긴다. 이때 수저통에 있는 수저를 꺼내는 소리가 상당히 시끄러우므로 괴엥장히 조심히, 또 천천히 꺼내야 한다. 예전에 시끄럽게 꺼냈다가 아내에게 한소리 들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다. 앞접시는 어떠랴. 사기그릇의 부딪히는 소리는 잘못하면 굉장히 크게 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하나를 조심스레 빼서 가슴팍에 붙이고 또 하나를 꺼내 반대편 가슴팍에 붙인다.(Like a bikini) 그리고 다시 뒷발을 들고 소리 없이(Like a Ninja) 큰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부엌으로 가 마실 술과 잔을 또 챙겨 온다.
한참을 아내가 저 방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이미 9시 10분이 지났다. 불쌍한 족발은 우리 집 문 앞에서 차갑게 식어만 가는데 아내는 소식이 없다. 카톡이라도 잘못 보냈다간 그 진동소리에 아이가 깰까 봐 보낼 수도 없고 방에 확인하러 가는 행위는 더더욱 할 수 없다. 9시 20분이 되어도 아내는 소식이 없다. 오늘따라 애가 왜 그리도 안자나 싶다.
9시 반이 되었다.
이제는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내 배도 한계가 왔다. 족발도 한계가 왔지 않을까 싶다.(이런 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아내가 아이를 재우고 있는 방 문을 살짝 열어본다.
문제는 문을 열어도 아이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을 열면 아내의 반응을 먼저 봐야 한다. 예전에 한번 문 열었다가 아이가 안 자고 있어서 나를 향해 나가라고 팔을 마구 휘저은 적이 있어서 조심스럽다.(쉬운 게 없다)
문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열며 고개를 그 틈 사이로 집어넣었다.
아이는 일단 누워있다. 아내는 문을 등지고 아이를 안고 있다. 둘 다 반응이 없다. 아내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완벽하게 침투했군) 아이도 확실히 잠이 들었다. 슬그머니 아내를 흔들어 본다.
????
반응이 없다.
좀 더 세게 흔들어 보았다. 또 반응이 없다.
잠들었다.
.....
주문해 둔 족발을 잊고 잠이 들 정도라니... 한편으로 짠하다.
그러나 그 죄로 우리는 차디찬 바닥에서 잠들어가는 차가운 족발을 먹어야 한다. 아내를 깨운 후 얼른 문 밖에 족발을 구출하러 갔다. 얼른 큰방으로 족발을 데리고 와 심폐소생술을 해야 한다.
찍 찍 찍
족발은 유난히 일회용품이 많이 나오는 배달음식이다.
족발, 날치알밥, 막국수만 해도 세 갠데 그 외에도 쌈, 양념 그리고 밑반찬까지 하면 일회용 플라스틱만 8개다. 그 위에 붙어 있는 비닐 뜯는 것도 일이다. 비닐봉지 맨 아래에 깔려있는 족발은... 소생불가다. 너무 차갑게 식어있다.
우리가 미안하다 족발아
그렇게 우리는 10시에 야식을 먹게 되었다.
아내는 둘째 임신 이후 먹는 양이 확연히 줄었다. 자다 깨워서 먹는 데다 음식이 식어있으니 당연히 맛도 없었을 거다. 우리는 별 이야기도 못 하고 그렇게 20분 만에 야심 차게 준비한 야식타임을 끝냈다.
아내가 양치하는 동안 나는 뒤처리를 한다.
설거지에 일회용품까지 씻어 말려둔다. 모든 뒤처리를 마치고 나서 잘 준비를 하고 있는 둘째가 자고 있는 큰방으로 간다. 아내를 안아주며
오늘도 고생했어요
여보도 고생했어요
그리고 큰 아이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서 잠이 든다.
다음부턴 아이가 확실히 자면 주문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