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이라는 단어를 처음 써본다
부모가 되어 보니 정말 많은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간다.
가만히 있다가도 화가 최고치를 찍는 것도 예삿일이다. 육아는 정말 힘들고 지치는 일이지만 가끔 아이의 예쁜 모습을 보면서 또 하루를 살아가고 힘을 얻는다.
살면서 '뭉클'이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었다.
설레었던 적도 있고 가슴 시리도록 아픈 적도 있었지만 '뭉클'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생소했다.
얼마 전 큰 아이의 체육대회가 있었다.
4살짜리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하는 체육대회였는데 동네에 있는 몇 개의 어린이 집이 연합하여 체육관을 빌려하는 나름 큰 체육대회였다.
아내는 두 달 전부터 체육 대회가 있을 예정이니 휴가를 내라고 했다.
휴가를 내라고요??
휴가는 가족과 해외여행을 갈 때나 썼는지라 아이 체육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휴가까지 내야 하나 싶었다.
아내는 거기에 덧붙여
아빠들 다 참가하는 거라 꼭 와야 해요
다른 아빠들도 휴가를 낸다고 한다.
내 초등학교 운동회 때 아버지는 딱 한번 왔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바쁘니 충분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섭섭하다기보다는 당연했다.
그래서 굳이 어린이집 체육대회에 내가 참가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장인어른은 항상 운동회에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 어린이집 체육대회에 장인장모님은 물론이고
나의 어머니와 내 동생까지 체육대회에 오라고 연락을 돌렸다.
체육대회 당일.
우리 가족 총 8명은 체육대회를 하는 체육관을 찾았다.
수백명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체육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대가족이었다.(최고 참가인원 상까지 받았다)
진행자의 진행에 따라 이런저런 체육활동을 했다.
다 같이 몸풀기 춤을 추기도 하고 풍선 불기도 하고 이것저것 했다.
네 번째 순서로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줄을 서고 아빠들은 반대편에 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나는 반대편에 다른 아빠들과 함께 서 있었다.
미션은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있다가 뛰라는 신호를 보내면 아빠한테 달려오는 활동이었다.
거리는 약 50m 정도였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잘 안 뛰어왔다. 일단 엄마 손을 놓지 않는 애들도 많았고 뛰다가 멈추는 아이들도 있었고 다시 엄마한테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직진으로 가지 않고 대각선으로 가는 아이도 있었고 엄마 손을 놓고도 뛰지 않아 선생님이 손 잡고 뛰어주기도 했고 각양각색이었다.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아빠가 무안한 경우도 있었는데 달려와 아빠한테 안기는 게 아니라 담임 선생님한테 안기는 아이도 있었다.
큰 아이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 하지 않는다.
체육대회 하는 동안에도 우리 부부에게 안겨있거나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작은 아빠에게 여러 차례 안겨 있었다. 아이는 꽤 뒷줄에 서 있었는데 그전에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아이는 그전까지 징징거리며 아내의 손을 잡고 줄 서 있었다.
어쩌면 이 활동은 아빠와 아이 간의 평소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한테 안기지 않고 선생님한테 안기는 아이를 보며 아빠가 평소 일하느라 바빠 아이와 시간을 많이 못 가지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집으로 가기 때문에 평일에는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이 얼굴을 평일 내내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둘째는 나보다 엄마를 훨씬 많이 찾는다. 내가 안아줘도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하여 섭섭할 때도 있다.
큰 아이 차례가 왔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뛰라는 신호를 주었고 아이는 엄마 손을 놓았다.
나는 아이 반대편에서 쭈그려 앉아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평소에 아이를 부르는 호칭으로 불렀다.
이쁜 내 새끼~
이 호칭은 사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날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아이에게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아이가 뛰기 시작했다.
아이는 저 멀리서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듯 직진으로 오는 게 아니라 살짝 왼쪽으로 뛰었다. 그러다 팔을 벌리고 있는 나를 보았고 정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더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 순간, 정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몸에 힘이 빠지더니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이러지? 눈물이 날 상황이 아닌데 민망하게...'
아이는 세상 즐겁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씩씩하게 달려와 폭 안겼다.
나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아이 볼에 연신 뽀뽀를 해주며 이야기했다.
잘했어 잘했어 우리 이쁜 내 새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살짝 뒤로 돌아서서 아이를 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가슴이 너무 뭉클하고 벅차서 아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를 더 꼭 안아주었다.
장인장모님과 어머니는 연신 아이 칭찬을 하셨다.
엄지 손가락을 척 올리며 정말 잘 뛰었다고 칭찬하셨다.
체육대회가 끝날 무렵 장인장모님은 일이 있으셔서 먼저 가셨고 나의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식사 후 카페에 갔다.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아까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까 OO이가 나한테 달려오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뭉클했는지...
그러자 동생이
난 아까 그 장면 보고 울었는데?
라고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동생은 아직 미혼이라 부모로서의 마음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도 눈물이 났다는 걸 보면 나와 동생은 비슷한 감정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와 스킨십이 없었다.
항상 바빴고 무서웠고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가까이하기 어려웠고 마음은 있지만 서로 표현하지 않았다. 우리 형제는 그렇게 자랐다 보니 큰 아이가 그렇게 환한 미소로 나한테 달려와 안기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비슷한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뭐라 정확하게 표현은 하지 못하겠지만 서로 같은 포인트에서 '뭉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는 부모로서 느끼는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동생이 큰 아이가 나에게 달려와 안기는 모습을 촬영해 주었다.
겨우 10초 밖에 되지 않는 그 영상을 나는 수십 번 돌려봤다.
영상으로는 그때의 뭉클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저 아이가 달려오는 영상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태어나 처음으로 '뭉클'하다는 단어를 쓸 정도의 신기한 기분이었다.
아마 내 평생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될 것 같다.
이것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자 기쁨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