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번 가보자

2020년 6월 3일의 기록

by 루시

나와 남편이 다니던 대학교는 우리 만남의 시작점이 되어 주어 우리에게 좀 더 특별한 곳인데, 모두가 그렇듯 졸업 후에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어쩌다 한 번 교문 앞이나 지나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오히려 더 자주 가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몇 년을 공부했으니 구석구석 익숙한 곳이기도 하고, 주말에는 수업도 없어 한산한 공원처럼 느껴진다. 친구들과 맥주캔을 비워가며 추억을 쌓았던 광장은 아이에게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넓은 잔디밭이 되어주었고, 봄이 되면 와인 한 병 가지고 올라가 경치를 안주 삼던 야트막한 학교 뒷 산은 좋은 운동 코스가 되어 주었다. 주차나 편의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아이 짐이 많은 우리 가족의 산책 코스로 아주 훌륭하다. 내가 벌써 엄마가 되어 아이 손을 잡고 이 모든 공간을 누비고 있다는 사실에, 올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미루고 미루다 각자의 마지막 학기에 졸업을 위해 마지못해 들었던 전공 필수 수업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첫눈에 혹 반했다 거나 하는 드라마 같은 스토리는 아니지만, 추억 삼아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진다. 기말고사를 끝낸 수업시간이었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일명 ‘쫑파티’를 준비해 줄 사람을 지원받았는데, 이미 기말평가도 끝난 데다가 대부분 졸업을 앞둔 터라 더 이상 교수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어서 그런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모두 데구루루 눈만 굴리는 침묵 참기 시간이 몇 초 흐르고 나는 지고야 말았다. 자주 그렇듯 말이다. ‘에라이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며 손을 척 들었고, 마침 동시에 손을 든 건너편의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고, 둘이서 음식을 준비해야 했으니 서로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렇게 학기를 무난하게 마무리하고 마침내 여름 방학이 되었고, 나는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평소에 잘 찍지 않는 사진도 엄청나게 찍어서 여기저기 올리며 신나게 놀았는데, 낯익은 이름으로 메시지가 하나 왔다. 그의 이름이 특이한 편이라,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것이 그의 연락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에 큰 몫을 했다. (이름을 지어 주신 할아버님의 굉장한 혜안에 감사드린다.)


“부산 여행 중이신 가 봐요”


사실 연락처를 주고받았다는 것도 잊혔을 즈음이라 무슨 일로 연락을 했을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는데, 연 이은 메시지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제가 부산 사람 이어서요. 맛집 좀 소개해 드릴까요?”


평소 먹기 위해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만큼 먹는 것에 진심인 나는 신이 나서 한참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빽빽한 맛집 추천 메시지와 함께 한 여행은 행복하게 끝이 났다. 서울로 돌아와 ‘덕분에 잘 놀았으니 커피라도 한 잔 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인사치레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그런데 이 남자가 대뜸 자기는 삼겹살에 소주가 더 좋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맛있는 삼겹살 집을 안다지 뭐야. 그럼 어디 한번 가 봐야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거절은 예의가 아니니까. 그렇게 삼겹살에 혹 한 나는 ‘어디 한번 더 만나보지 뭐’를 몇 번 더 거쳐 그와 연인이 되었고, 5년의 지지고 볶는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아빠, 우리 한번 가보자, 늑대 잡으러!”


오늘은 늑대와 사냥꾼 놀이다. 어디 삼겹살이나 먹으러 한번 가보자 했다가 결혼까지 골인한 나는, ‘한번 가보자’는 아이의 말에 괜히 마음이 간지럽다. 나이가 들어가니 새로운 것도 많이 없거나 와 괜히 겁만 많아져서 익숙한 것이 편한 사람이 되어간다. 내 입에서 어디 한번 가보자는 말이 나오는 일은 자연스레 줄어들고 있었다. 그 대신 이제 내가 아닌 나의 아이가 ‘한번 가보자‘ 며 새로운 경험들과 인연들을 만나갈 것이라 생각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생각에 덩달아 내 마음에 에너지가 차오른다.


그래. 네가 우리 앞에 열어 줄 새로운 세계로 어디 한번 가보자. 손잡고 같이!

“아빠, 우리 한번 가보자, 늑대 잡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