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6일의 기록
머리카락이 유독 얇고 짧게 태어난 다온이의 머리 스타일은 세 번째 생일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아직 갓 태어난 병아리 마냥 보송보송하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끌어 모아야 겨우 사과 꼭지 같은 머리모양이라도 만들어 묶을 수 있다. 아직도 이렇게 머리털이 민들레 홀씨 마냥 보드라운데, 벌써 다온이는 관계에 대해 배워가나 보다. 자연스럽게 요즘 놀이에 자주 등장하는 건 왕자님, 사랑, 반지, 결혼 따위다.
“결혼할 때 반지를 끼고 뽀뽀를 하면 사랑이 느껴져요”
다온이가 오늘의 열변을 토한다. 아빠 새끼손가락에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반지를 손에 들고 말이다. 사랑은 어떤 느낌이냐고 물으며 다온 아빠가 대화를 이어나가 본다.
“사랑은 솜사탕 같기도 하고 애벌레 같기도 해요.“
사랑은 솜사탕 같다니. 제법이다 꼬맹이. 고슴도치 엄마는 그 찰나에 내 딸이 커서 시인이 되려나 아님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되어 주려나 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온이가 다시 말한다.
“애벌레는 나뭇잎을 좋아해요. 그래서 애벌레는 나뭇잎을 먹고 자라요. 애벌레는 나뭇잎이 꼭 있어야 해요.”
아이에게 사랑은 이런 것인가 보다. 좋아하고, 꼭 옆에 있어야 하는 것. 비단 아이뿐만 아니고 사랑하는 이들의 시작이 대부분 이러하겠지만, 엄마를 향한 아이의 사랑만큼이나 맹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눈앞의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엄마의 냄새와 체온을 찾고, 좋아하게 되고,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울기도 하고. 아이는 그렇게 최초의 사랑 옆에 꼭 붙어 자라나며 서서히 세상의 감정들을 배워 나간다.
그 시기는 엄마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새로이 배우는 시간이 된다. 나에게 아이를 낳기 이전의 사랑은 누군가가 좋은 이유를 찾고, 그를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고, 내가 찾은 이유가 그가 좋음의 근간에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나가며 마음속에 새기는 과정이었다. 그러다 아이라는 존재가 내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후에 나는 생각한 그 과정들이 모두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아, 이런 사랑도 가능하구나.
초음파로 첫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을 때, 불룩한 배 속 아이와 처음 강렬한 유대감을 느꼈다. 초음파기기를 배에 갖다 대는 순간 진료실 가득하게 울려 퍼지던 우렁찬 심장소리가 떠오를 때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까닭 모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그 순간에 나는 아마도 아이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아직 이름도 없고 얼굴 한 번 마주 보지 못한 존재와 말이다.
막상 낳은 직후 한두 달간은 육아의 고단함에 지쳐 이런 훈훈한 감정보다는 이 고난에서 일단 나부터 생존해야 하고, 너도 생존시켜야만 한다는 우악스럽고도 억척스러운 에너지에 휘말리게 되었지만, 코에서 튀어나온 코딱지마저 어느 순간 이유도 없이 사랑스럽게 느끼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겨울방학을 맞아 정신없이 바빠진 덕분에 혼자 조용히 기억을 되새기며 글을 쓸 시간은 물론 에너지도 한동안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루기만 할 수 없어 오늘은 다온이를 옆에 둔 채였다. 아이에게 글을 보여주는 날은 사춘기가 올 때까지 아껴두고 싶었는데, 이제 소설책도 줄줄 읽는 어린이 인지라 제목을 한눈에 쓱 읽고는 자기 이야기인지 알아 버렸다. 보채는 통에 마지못해 제일 첫 번째로 적은 글인 ‘험마 좋아서 햄복해’를 보여주었더니, 한참을 집중해서 읽는다. 한 편을 금세 다 읽어버리고는 엄마 사랑한다며 내 팔에, 등에, 얼굴에 볼을 갖다 대고 고양이처럼 연신 비비고는 무릎 위에 앉아 아주 껌딱지가 되어 버렸다. 내가 한 단어 한 단어 꼭꼭 마음을 담아 눌러쓴 글이란 걸 알기는 하려나.
한참을 꼭 붙어 있어 둘의 따끈한 정도가 같아지고 나서야 다시 혼자 글을 이어 쓰기 시작했는데, 무릎에 남기고 간 따끈한 온기마저 ‘사랑’스럽다. 애벌레에게 자연스럽게 한 귀퉁이를 기꺼이 내어주는 나뭇잎처럼, 사랑한다는 말에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니. 누군가를 나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응당 내 옆에 있을 것이고, 서로를 어여삐 여길 수 있는 존재가 매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큰 위안이 되어준 다니. 아이가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어른으로 커가면 커갈수록 이 소중한 감정들은 옅어지고 잊힐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다정한 사이로 서로 사랑해 봐야겠다고 오늘도 마음속에 꾹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