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코로나, 이사, 이별, 그리고 비움.
지난 내 삶을 반추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대개가 그렇듯, 인생이 다른 국면으로 넘어 갈 때는 딱 그 만큼의 숙제가 생긴다는 말이 떠오른다. 주어진 미션을 통과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임처럼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를 느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의 슬픔은 옅어진 지 오래고, 코로나 팬데믹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졌다. 그 사이 번잡스러웠던 인간관계는 비대면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스레 정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네 번의 이사를 해야만 했다. 그 중에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내쫓기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더 줄어든 예산으로 아버지 병원근처로 옮기기 위해 다가구 주택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삿짐을 여러 번 싸고 풀면서 깨달았다. 내가 물건의 필요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저 물욕만 채운 채 인생의 짐들을 이고 지고 다녔던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좁아진 공간과 주택 특유의 구조에서 오는 불편함은 부쩍 퇴보한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문제는 이 짐들이 현실적인 문제와 맞닿았을 때 그 무게를 더한다는 점이었다. 벽에 걸지 못한 액자들, 부엌 찬장에 넣지 못했던 그릇들, 펼쳐보지 못하고 수개월을 박스 안에 방치했던 책들까지. 쓰이지 못하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은 그렇게 그대로 인생의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먼저 결정함으로써 끝도 없는 욕망으로부터 멀어지고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고 한다. 난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 어떤 물건을 살지가 아니라 어떤 물건을 비울지를 먼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박스 두 개를 준비해 물건을 비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박스에는 기부업체에 보낼 것들을 담았고, 나머지 한 박스에는 버리기 아까운 애매한 물건들을 넣어두었다. 초반에는 비우는 것보다 두 번째 박스에 쌓아두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왜냐하면 사고 늘리는 것에 익숙해진 난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버려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지럽혀진 방을 보자 가슴 한 켠이 답답했다. 수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들은 이루지 못한 지난 목표들을 떠올리게 했다. 심지어 후회와 과오로 점철된 옛 기억들까지 떠올리게 하면서 말이다. 그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당장 물건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쌓아 두었던 것들을 조금씩 분류해 나갔다.
그 과정이 쌓이고 쌓이자 나만의 정리기준이 생겨났다. ‘지난 한달 동안 이 물건을 몇 번 사용했는가?’ 한 번도 없다면 비움 박스로 가야 하는 물건이었다. 한 달을 기준으로 해당 물건의 쓰임 여부를 따져 보고 분류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리고 버리기 아까운 애매한 물건들은 사용 빈도수 보단 가격에 의미를 부여해서 결정했다. 너무 비싸고 어렵게 사들인 물건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보되, 그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비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물건을 그냥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중고거래를 통해 되팔았다. 소정의 판매금액은 계속 정리를 해 나갈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어주었고, 파는 과정의 번거로움은 내가 쉽게 물건을 사들이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방지턱 역할을 해주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면서 인생의 짐꾸러미들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았다. 축적과 가속을 조장하는 ‘더하기’의 현대사회에서 ‘빼기’를 꾸준히 실천하려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막연한 불안감을 감내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가족들과 숱한 마찰을 겪으며 비움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까지 참아야만 했다. 집안에서 물건이 없어지거나 찾지 못할 때면 어김없이 내가 범인으로 지목되기 일쑤였다. 이 의심에 난 기억회로를 되짚으며 일단 사과부터 해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청소를 하기만 하면 집안의 물건이 사라지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에게 비움의 전조증상이 오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 때부터 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팬데믹은 잘 살고 싶은 나의 의지를 꺾으며 계속 과거로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 어지럽혀진 집안을 깔끔히 청소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삶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었으니까 말이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생각들과 복잡한 감정까지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 선순환만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 믿으며 가족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더 빨리 물건을 비워 나갔다. 가족들의 물건까지 말이다.
그러나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정리를 순탄하게 하려면 반드시 배려를 수반한 ‘물건 빼기’에 들어가야만 한다. 여기에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물건 주인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즉, 내 눈에 그 물건이 불필요해 보일지라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난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가족들의 질타를 세게 받았던 것이다. 물건의 소유주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내 기준에서 정하고 버렸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물건과 존중, 두 가지 상실을 동시에 겪은 가족들은 언제나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내라고 난리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각자의 보존구역을 정했다. 거기에 있는 물건들은 절대 손을 대지 않기로 한 것이다. 또한 부엌이나 화장실처럼 서로 함께 사용하는 공간의 물건들은 그것을 산 사람에게 반드시 물어보기로 정했다. 감사하게도, 내가 달라지자 우리 가족들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건이 빠지고 집이 아늑해 지자 가족들도 함께 정리에 동참했다. 내가 마음대로 버렸을 때는 물건을 더 깊숙이 숨기곤 했는데, 이제는 다들 알아서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할 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난 알았다. 물건의 존폐유무는 물건의 소유주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보면 ‘쓰인다’라는 말은 ‘소모된다’는 말과 결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제 역할을 다하며 빛을 발하는 게 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손 한번 안타고 방치된 채 낡아가는 것들도 있다. 사실, 살다 보면 목표와 취미 등 다양한 이유로 물건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필요에 의해 사들인 수많은 물건들을 집안 어디에 두고 쓸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 선택을 미루지 않고 ‘물건의 쓸모’에 촉각을 세운다면 자신만의 정리기준이 생길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중장기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본인이 원하는 삶을 그리며 거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간소하게 추려서 나아갈 수 있으니깐.
“물건이 늘어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삶이란 모름지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프랑스 수필가 도미니크 로로의 말이 내 경험의 확신을 더해주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의 소유여부를 결정하는 건 오히려 장기적인 인생진로를 정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손에 잡히고 물성이 있는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게 더 쉽지 않겠는가. 이 과정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인생을 좀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는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비움을 실천하고 나서야 내가 느낀 건, 삶이 명료해지는 순간이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하지 않을지’에서 온다는 깨달음이다. 비움도 마찬가지다. 어떤 물건을 뺄 지를 결정할 때 삶이 더 가치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물건이 빠진 빈 공간은 여유를 느끼게 해주며 충만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고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삶의 정리’가 가져다 준 커다란 이로움이라 생각한다.
난 수차례 진통 끝에 현재는 책상 하나에 책장 하나, 그리고 한 칸 안에 다 들어가는 사계절의 옷들만 소유하게 되었다. 기존 짐들을 반 이상 비울 수 있었던 이유는 가전가구는 이사 다닐 때마다 무거운 짐일 뿐이고, 꾸밀 수 있는 옷들은 거추장스러운 부산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은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시간간격을 두고 심사숙고한다. 바로 들임과 버림의 과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항상 생각한다. 건강하고 단순한 삶을 영위하는 데는 아주 소수의 물건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런 나의 변화는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 하나 하나가 똘똘 뭉쳐져서 만들어진 결과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정리를 실천하도록 만든 것도 비움의 이로움을 직접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리라.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 작업을 통해 공간도, 인간관계도, 마지막으로 삶도 다이어트가 저절로 되었다. 이렇듯 주기적으로 삶의 때를 벗기는 작업을 해주자 인생이 온전하게 흘러가는 충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넘기고 있는 이들에게 비움 박스를 선물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