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언니가 버렸지?”
집안에서 물건이 없어지거나 찾지 못할 때면 어김없이 범인은 나로 지목되기 일쑤였다. 이 의심에 기분 나쁜 감정이 들기도 전에 난 나의 기억회로를 되짚으며 일단 사과부터 해야 했다.
그래도 처음 몇 번은 아니라고 우기기도 했지만 정황상 나 일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열에 아홉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청소를 하기만 하면 집안의 물건들이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은 모든 게 나의 ‘비움강박증’에서 초래된 불상사였다.
마음의 불안에서 오는 ‘저장강박증’은 언젠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물건을 쌓아두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이름을 따서 ‘디오게네스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상은 기본적으론 생존과 관련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의학에선 이런 저장 본성이 강해지면 새로운 자극을 처리하지 못해 뇌기능 장애와 인지능력 저하까지 유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반대로 ‘비움강박증’은 물건을 저장하고 쌓는 것이 아니라 바로 버리는 것을 말한다. 상반되는 개념이긴 하지만 저장과 비움, 모두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중 나는 후자를 택했다. 쓰이지 않는 물건, 공간만 차지하는 가구, 정리되지 않는 잡동사니 등이 나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건을 치움으로써 얽혀있는 생각과 고민들이 해결되는 것 같아 더 부지런히 버렸다.
나에게 비움 전조증상이 오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코로나팬데믹'이었다. 자연스레 집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눈에 보이는 족족 치우기 시작했다. 청소는 나에게 그날 하루 성실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리추얼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로 인해 무기력해진 나를 건실히 일으켜 세우는 의식과도 같았다.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반발 심리가 작용해서 청소와 비움에 집착하게 되었다. 마음을 먹고 몸만 움직이면 결과가 바로 나타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 행위가 뿜어내는 도파민이 나를 살게 했던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단절이 가져온 현실세계는 줄어든 소득만큼이나 삶의 여유까지 앗아가 버렸다. 나의 비움 강박증은 이런 외부 스트레스에 대한 내면적 불안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라 본다.
공교롭게도,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코로나와 개인적인 불행이 맞물리면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딱들였다. 그 당시 집주인은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었고 그럴 돈이 없었던 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부동산 상승장에서 더 적어진 예산으로 집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다른 방도가 없었던 난,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다가구 주택에 살게 되었다. 고작 전에 살던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떨어진 곳으로 이사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해남 땅끝마을까지 훌쩍 이동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과정에서 내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살면서 수시로 정리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가볍게 살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더불어 비우지 않으면 인생 자체가 버겁고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함께 말이다. 그렇게 현실 자각타임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인생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 공간을 온전히 내 물건들로만 채웠던 풍요로움에서 그 공간을 가족들과 공유하며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배려를 기본으로 한 ‘물건 빼기’ 작업부터 들어가야만 했다. 여기서 '절대적인 배려'라 함은 내 물건은 빼고 그 공간에 가족들의 물건을 놓게 하는 데서 나오는데 설사 그 물건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대로 둬야 한다는 얘기다. 난 그렇게 하지 않아 가족들의 질타를 많이 받았다. 물건의 주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오롯이 내 기준에서 정하고 버렸기 때문이다. 물건과 존중, 두 가치의 상실을 동시에 겪은 가족들은 언제나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물건을 비우고는 있지만 정리가 아니라 ‘막 갖다 버리기’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미경은 위의 책에서 ‘무조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목표를 두고 무엇을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루하루 조금씩 생각해 보고 실천해’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난 내 인생을 제대로 성찰하지 않고 그저 감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건부터 없애버려서 문제가 발생한 거였다.
몇 번의 진통 끝에, 난 더 이상 가족들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고 내 물건에 대해서만 결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진 자리에 여유 공간이란 것이 만들어지면서 가족들과의 마찰도 점차 줄어들었다. 눈에 보이고 몸소 느껴지는 물리적 빈 공간은 머릿속까지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더 나아가 남겨진 물건을 보면서 나 자신을 제대로 알아가고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시간들을 자주 갖게 했다.
정리를 실천하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든 분들에게 가장 먼저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실천해 나가길 바란다. 인생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는데, 그 속에 관계의 불화가 끼어들면 오히려 처음 맘먹었던 선한 의도가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기 깐 말이다. ‘내가 정리해 주면 좋아하겠지’란 오만함을 부리다 그만 우리 가족들을 괴롭히고 말았던 내 경험에 비추어서 하는 말이다.
물건의 존폐유무는 물건의 소유주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을 사기로 한 사람이 산 목적을 정확히 알 테고, 그것의 쓰임이 더 이상 없다는 것도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어쭙잖게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공간을 비워주면 자연스레 그 옆의 공간도 함께 치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혹여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더디더라도 조금씩 정리의 이로움이 집안 곳곳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배려해주자. 함께 사는 이들과의 조화(서로 잘 어울림)도 생각하면서. 당신의 공간에 비움의 행복이 깃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