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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pr 05. 2016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서평01]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보여준 그 너머의 세상 이야기 



<창백한 언덕의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들>
작가 스스로 세 편에 대해 "같은 책을 세 번 썼다"고 한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 마스지 오노는 과거 스승의 순수 예술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전쟁과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려 명예와 부를 누리며 승승장구 해온 화가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전범이라는 비난뿐이었으며, 과거 그의 제국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자신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은밀한 자부심과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음을 변명 아닌 변명으로 합리화한다.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과거에 갇혀 소위 자신이 잘 나갔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며, 현재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끝끝내 옛날의 자신을 잊지 못하는 한 인간의 초라하면서도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비애가 잘 그려진 수작이다. 제목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부유하는 세상'이 가진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의심해보는 것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요소이다. 


최근 발표한 <파묻힌 거인>과 함께 초기 작품부터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빼놓지 않고 완독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공통된 주제로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들을 다양한 범주의 장르 안에서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독자라면 누구라도 그 탁월한 스토리텔링에 감탄하며, 끝까지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야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내레이션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며, 작가의 살아 숨 쉬는 문체와 스토리가 압도적이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화가, 집사, 혹은 음악가, 또는 탐정, 그리고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 혹은 클론으로 변주되어 왔다. 언제나 안개 속에 갇힌 듯, 모호하면서도 불투명한 과거 속 인물과 현재를 살아가는 화자의 내밀한 독백은 확고한 결말보다는 모든 것들이 환상의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효과에 집중한다. 그러한 과거와 기억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하는 동안, 우리는 진실에 한층 더 가깝게, 더욱 깊숙이 다가가고 마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의 기억은 한계를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애석함이 베어난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그 너머의 어떤, 무언가 또렷이 표현할 수 없는, 통감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경계선, 그 너머까지 밀어붙인다.


때로는 진실보다는 '망각'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지 않을까라는 메시지, 손에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그 불분명한 것을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갇혀 있는 '나'라는 주체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작가가 만들어 낸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멀리 있는 존재들이 아닌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는 불완전한 시민들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복기하며 과연 잘잘못을 분명하게 따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뇌하고 반성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은 번역자의 후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창백한 언덕의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들> 작가 스스로 세 편에 대해 "같은 책을 세 번 썼다"고 한다. 세 작품 모두 "한 개인이 불편한 기억과 어떻게 타협하는지"를 그려내려고 했으며,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때때로 인간은 틀릴 수도 있는 신념을 전력으로 붙잡고 자기 삶의 근거로 삼는다. 내 초기 작품들은 이런 인물들을 다룬다 그 신념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환멸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건 그저 그 탐색이 어렵다는 걸 발견한 것뿐이고,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삶의 요체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것, 문학이 영광이 아니라 좌절의 자리에서 빛난다는 걸 확인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겉보기에는 일본적이지만, 그 주제의 많은 부분 곧 비밀, 회오, 은밀함, 위선, 상실 등은 20세기 영국 소설이 천착해 온 주제와 밀접하다. 자기 변혁을 꾸준히 추구해오고 기꺼이 그 너머의 세계로 항해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이 작가야말로 위대한 작가라고 감히 단언하여 말하고 싶다






p.201


"가장 좋은 건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말일세. 사람들이 부유하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말 이세"


"화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가장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이 해가 진 뒤 환락의 집 안에 떠돈다네

그리고 이런 밤들이면 말일세, 오노, 그 아름다움 중 어떤 것이 이 곳 우리의 거처로 은연중에 스며든다네


(중략)


내가 부유하는 세상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이유는 나 자신이 그 가치를 믿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네. 하지만 한 세계의 아름다움, 그것의 진짜 유효성을 의심하는 한 그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향유하기란 어렵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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