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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Nov 20. 2018

영화 <영주>

#사적인 영화 31: "모든 성장에는 애도가 따르는 법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1/22일 개봉 예정)




교통사고로 양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영주(김향기)는 자신의 학업을 포기한 채, 남동생 영인(탕준상)만큼은 자기 손으로 책임지려는 누나이다. 그런 누나의 속도 모르고 영인은 사고를 치며 엇나가는데, 그에 대한 합의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영주는 현실의 벽 앞에 심한 좌절을 느낀다. 주변의 도움을 요청할 어른조차 없는 상황에서 영주는 문득 자기 부모를 죽게 만든 당사자의 집 주소를 보고,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직접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영화 <마음이>를 통해 아역 데뷔를 한 배우 김향기는 영주와 같은 얼굴을 하고 영화 내내 울고 웃는다. 조심스럽고 주눅이 든 영주,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지를 수 있는 아이. 어떻게든 돌파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영주의 모습이 김향기라는 배우가 지닌 작은 체구를 통해 뿜어져 나온다. 영주는 꿋꿋하다. 오래된 빌라에서 남동생 영인과 둘이 살며 치킨 한 조각 나눠 먹고 농담하며 웃는다. 갑자기 사라진 부모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영주는 빨리 어른이 돼야 한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짐짓 어른스럽게 걱정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다독이지만 실은 영주도 동생과 다를 바 없는 아직은 십 대 소녀이다. 하필 부모님 제삿날에 돌아오지 않는 영인을 기다리며 영정 사진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거실은 살풍경하다. 푸른 새벽빛이 들어오는 거실 가운데 맥없이 누워 있는 영주의 모습은 숨 쉬지 않는 작은 새 같다. 보이지 않는 피가 흐르는 그 작은 체구에 어떤 희망도 기운도 없다. 

  





그런 영주에게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를 죽인 가해자이다. "넌 좋은 애야. 아줌마는 알아." 우연히 찾아간 그곳은 두부 가게였고,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은 뇌사에 빠진 아들과 함께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이었다. 처음에 영주는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 안의 억울한 감정과 분노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리면 간단한 일이었다.  당위성은 충분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과 책임은 부모를 죽인 그들에게 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간단하지 않다. 나쁜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영주처럼 그들도 어른 아이라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심지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선뜻 도움을 주는 그들에게 영주는 오랜만에 따뜻한 정을 느낀다. 오히려 유사 부모와 같은 이 관계를 모른 척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이 눈 감아준다면 조금 더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인의 뼈 아픈 한 마디가 영주를 아프게 찌른다. "그럼 당장 이야기해. 가서 당신들이 죽인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이었다고 이야기해. 그래도 그들이 받아주면 인정할게." 영주는 향숙과 상문이 그럼에도 자기를 받아줄 것을 믿는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다. 일견 그들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영주는 몰래 향숙의 기도를 듣고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든다. 그들에게 있어 영주는 또 하나 덧붙인, 평생을 갚아 나가야 할 죄였다. 인간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다. 죄와 용서는 쉽지 않고 그럼에도 감정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과연 영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여기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냉혹한 현실에서 영주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차성덕 감독은 "누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성장에는 애도가 따르는 법이다."라고 했다. 감독 역시 십 대 시절 한꺼번에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으며, 문득, 부모를 죽인 자들의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고 한다. 가슴에 남은 상처는 평생의 애도라는 과정을 거쳐 조금씩 치유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안의 상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기보다 망각을 통해 빨리 잊고 현실에 적응하려는 태도에 익숙하다. 생각하지 말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념을 낳고, 그 상념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나의 영혼을 잠식하며...... 그 쓸모없는 생각 때문에 괜히 약해지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하게 마주 서야 한다. 우리의 아픈 부분을, 욕망을, 이해를, 그리고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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