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영화 35: 한 그릇 음식에 담긴 신비한 수수께끼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오랜만의 에릭 쿠 감독의 신작, <우리 가족:라면 샵(REMEN SHOP)>. <내 곁에 있어줘>를 추억하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그의 영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아시아 감독이자 지금까지 연출한 네 편의 작품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싱가포르 대표로 선정, 3대 영화제에 출품되며 인정받고 있는 에릭 쿠 감독은 그의 장기를 살려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를 한편 완성했다. 일본의 대표 음식 라멘과 싱가포르의 대표 음식 바쿠테가 그것이다. 이 두 음식 모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서민적인 음식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라멘은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 메뉴이지만 바쿠테는 생소했음에도 그 이국성에 매료되어 영화를 보는 내내 침을 삼켜야만 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동시에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두 음식은 두 나라의 경제 발전과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음식은 문화적 정체성,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음식은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 있다. 매우 신비한 방법으로 사람을 하나로 모아준다. 이 영화는 서로를 받아들이며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음식은 그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양식이다."라고 에릭 쿠 감독은 말한다.
마사토(사이토 타쿠미)는 아버지(이하라 츠요시)와 함께 일본에서 삼촌(벳쇼 테츠야)과 함께 라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술로 하루 일과를 보내며 괴로워하는데,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마사토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 그러던 중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남겨진 유품을 정리하던 마사토는 싱가포르 출신의 어머니(쟈넷 아우)의 일기장과 사진들을 발견한다. 사진 속에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마사토는 외삼촌(마크 리)의 편지를 보고 오랜 고민 끝에 싱가포르로 떠난다. 그곳에서 푸드 블로거 미키(마츠다 세이코)의 도움으로 바쿠테 가게를 운영하는 외삼촌과 어렵사리 재회한다. 일본인 아버지와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던 외할머니와 만난 마사토는 자신의 진심을 담은 새로운 요리를 대접하는데, 과연 죽은 어머니의 소원을 그가 대신 이뤄 줄 수 있을까.
영화 속에는 어디 하나 화려하거나 비싼 음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소박한 한 그릇의 음식일 뿐이다. 치킨라이스, 칠리 크랩, 피시 헤드 카레 등 이국적인 퓨전 음식이자 온기가 전해질 것 같은 양 많고 포근하고 따뜻한 음식이다. 바쿠테는 돼지 뼈를 마늘, 후추와 함께 장시간 삶은 수프 같은 국물 음식으로 중국계 싱가포르 노동자들의 가난과 눈물이 담긴 역사를 담고 있다. 새로운 경제 발전을 위한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하층민을 위한 음식, 그 안에는 가족을 향한 묵묵한 사랑과 책임도 담겨 있다. 마사토의 어머니 집안은 대대로 바쿠테의 레시피를 이어오며 그 자부심 또한 지켜내고 있는 집안이다. 마사토의 아버지 또한 일식에 대한 자부심, 라멘에 대한 고집을 지닌 장인이다. 어머니가 해주었던 바쿠테의 맛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는 마사토는 두 음식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레시피로 외할머니의 굳어 있던 마음을 녹여내려고 하는데, 그래서 음식이란 참으로 신비롭고 신비하다. 하물며 소울푸드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음식이 지닌 맛은 마치 인장처럼 우리 몸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비단 혀뿐만이 아니라 머리, 혹은 마음, 그 깊은 곳 어딘가에 꼭꼭 묻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바로 그 자신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유전자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먹은 음식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그 어떤 음식보다 엄마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느끼는 것도 그 안에 담긴 애정과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일까. 마사토는 그 잃어버린 맛을 찾아 싱가포를 찾는다. 그리고 곧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잊고 살았던 맛과 함께 잊고 지냈던 자신의 과거와 추억을 다시 찾아낸다. 그가 외할머니의 음식을 맛보며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잊고 지낸 자기 자신을 다시 되찾은 것 같은 기쁨,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 거기에 아버지의 슬픔까지.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한 발현일 것이다. 영화는 마사토의 움직임과 시선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한 그릇의 음식에 담긴 소박한 신비를 억지로 해부해서 보여주기보다 자연스럽게 녹아들듯이 세련되지 않으나 진심 어린 맛의 세계로 이끌어 나간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포근하고 따뜻했다. 보는 내내 흐뭇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스토리는 아니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정'이 흐른다고 할까. 그 중심에는 소울푸드가 있고 가족이라는 역사가 있고, '나'라는 주인공이 있다.
:
외할머니와의 첫 만남에서 한국의 아이돌처럼 잘생겼다고 말하는 대사가 재미있었다. 이제 미남의 기준은 한국 아이돌이 된 것일까. (감개무량할 수밖에.) 그리고 의외의 신스틸러는 외삼촌이었다. 그가 한마디 던질 때마다 웃음이 터졌는데 싱가포르의 대표 개그맨이라고 한다. 가장 의미 심장했던 장면은 마지막 미키의 등장이었다. 한 시절을 화려하게 풍미했던 일본의 전설적인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 이름(聖子)과 달리 악녀로도 통하는 그녀의 곱게 나이 든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어 새삼 진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마성의 여자. 마지막 장면에서 어쩐지 마사토와 미키의 미묘한 감정선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는 연상이고 이혼하고 중학생 아들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역시 사랑 앞에서 배경은 무용할 뿐, 바람직한 진행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은 앞으로 유투브가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블로그가 등장하지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었도 세상은 이 플랫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