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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pr 26. 2019

W.G 제발트의 이민자들

#16_ 고향을 잃은 이방인의 얼굴,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1992년 발표한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은 '네 편의 긴 단편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 이민자를 중심으로 타지에서 이방인이 된 네 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래도록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끝내 자살을 택하거나 죽은 거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간다. 누구도 그들이 겪은 고통의 근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면, '나'만이 과거의 기록을 찾아 집요하고 꼼꼼한 관찰로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다. 개별의 서사는 다를지언정 '이민자'라는 공통점을 지닌 인생의 굴곡과 깊이는 독특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최대한 건조한 문체로 사실을 담아낸 만연체 문장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그리하여 이 책은 충실한 '기록'에 가까운 '소설'이다. 마치 연작 소설처럼 이어지는 단편 속 '나'는 다른 인물이 아닌, 작가 본인에 가깝다. 결국 '나'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우리 이웃과도 같다. 무엇이 그들을 아프게 했으며 평생을 지닌 상실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세밀한 기록 속에 담긴 얼굴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자 했던 것일까. 이는 먼 훗날 이방인이 될 스스로를 위한 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고향을 잃고 헤매는 노마드 일수도 있다. 그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인도해주는 이민자들》는 기억에 관한 상실의 기록이며 더 나아가 존재에 관한 이야기다. 






네 단편 속 인물들은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 타의에 의해 고향을 떠난다. 그토록 오래 외국에 살면서도 어떤 이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원점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지워내지 못한다. 이미 그들이 기억한 고향은 사라지고 없기에 돌아와도 여전히 그들은 이방인의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 중에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유대인이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거나 죽은 거와 다름없는 삶을 연명한다. 헨리 쎌윈 박사는 의사로서 부유한 아내와 결혼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만 아내가 그의 유대인 혈통을 알게 되면서 몰락으로 치닫는다. 그의 정원이 지닌 자연의 고립은 마치 그의 축소판 같다. 


(20) 쎌윈 박사는 집 안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은신처에 틀어박혀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가 가끔 썼던 표현을 빌리면, 그런 생각들은 날이 갈수록 모호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별스럽고 더 정밀해졌다고 한다. (29) 그는 내게 고향이 그립지 않으냐고 물었는데, 이 질문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별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자, 쎌윈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지난 몇 년 사이에 향수병이 점점 더 심해졌다고 고백했다. (33)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군요. 돈일 수도 있고, 결국 발각되고 만 내 혈통에 대한 비밀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사랑이 식어서일 수도 있겠지요. (...)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 늦가을의 어느 날, 그는 가지고 있던 그 묵직한 사냥총으로 자살했다.



'나'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파울 베라이터는 나치의 등장으로 평화로운 삶의 질서가 일시에 무너지는 경험을 체험한다. 그는 자연과학 교사로서 성스러운 척하는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지녔으며, 산소가 부족하면 인간의 사고 능력이 떨어지기에 한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수업은 지극히 직관적 이어어서 직접 눈으로 관찰하는 수업을 중시했고, 주변 선생들은 그를 가리켜 '길 잃은 영혼'이라고 평했다. 그의 불행은 전쟁에서 비롯됐다.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이 여실 없이 세상을 파괴하고 짓밟고 지나갔다.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그와 가까이 지냈던 란다우 부인은 나치 시대에 독일인이 보여준 비열한 태도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분노한다. S시의 사람들은 파울 베라이터에 대한 조사(弔詞)에서 나치가 그의 삶을 파괴한 것에 대해 모호하고 성의 없이 언급하고 넘어간다. 전후에도 고향에서 살았고 죽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던 그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S시의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민자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9) 파울 베라이터가 자신의 뜻에 따라, 혹은 어떤 자기 파괴적인 강박증상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유명을 달리한 교사의 공적만 열거하고 있었다. (65)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69)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이 처참한 공격을 받은 사건 때문에 생긴 마음속의 분노와 불안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란다우 부인은 힘주어 말했다. (79) 기차는 그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요. 기차의 종착역은 항상 죽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 그것은 파울이 겪어야 했던 독일의 불행을 상징하고 있었어요. (...) 결국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죽는지 참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가 살아온 인생은 더욱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세계를 여행과 도시, 문명이라는 환상으로 보여주며 그 끝의 상실을 아득하게 그려낸다.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연장자로 오히려 볼품없어 보였던 암브로스는 일곱 살 아이의 눈에도 자기만의 상상 속에 갇혀 사는 할아버지로 비친다. 테레스 이모와 피니 이모, 카지미르 삼촌과 암브로스 할아버지는 가난과 실업으로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그 와중에 암브로스는 쏠로몬 집안의 집사이자 심한 사치와 탈선행위를 일삼던 쏠로몬의 아들, 코즈모의 시종이자 여행 동반자로 일한다. 그러나 심한 우울증을 앓은 코즈모가 죽음을 맞이하자 이내 곧 암브로스도 빈 껍질과 같은 우울증을 겪고 자기의 발로 병원에 입원한다. 퇴락과 파괴는 쏠로몬 가문의 몰락에서도 반복되어 이어지며, 그들이 여행했던 호화롭고 찬란했던 예루살렘은 과거의 영광은 뒤로 한채, 악취와 폐허의 세계로 전락한다. 판슈토크 교수의 정신 충격요법은 암브로스의 건강과 정신을 더욱 철저하게 말살해 나간다. 그럼에도 순종적인 자세로 꾸준히 충격요법 치료를 받는데 점점 암브로스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은 죽어간다. 


(126) 외삼촌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회상들을 아주 느릿느릿하게 이야기했는데, 지극히 사소한 것들까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더구나.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점점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래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외삼촌에게는 고통이기도 했고, 자신을 해방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구원이자 가차 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던 거야. (146) 판슈토크 교수는 아주 낙관적인 소견을 작성했지요. 하지만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는 아주 미약한 힘만 남아 있을 뿐, 이미 완전히 파괴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눈은 기묘하게 초점을 잃은 상태였고, 그의 가슴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 그는 에나멜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정장을 말끔하게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죽어 있더군요. (185)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막스 페르버는 맨체스터라는 산업혁명과 현대문명에 의해 망가진 대재앙의 현장을 상징하는 도시에 정착한다. 유대인들이 남기고 떠난 황량하고 거대한 황무지 같은 텅 빈 거리는 죽음의 정적이 감돈다. 맨체스터가 곧 자신이기도 한 화가 페르버는 디스크 수핵으로 편하게 움직일 수 없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매번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리기와 지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끝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지쳐버리는 그의 작업은 유대인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완성도 하지 못하고, 버릴 수도 없는 그림처럼, 그의 고향인 독일을 버리지도 그렇다고 화해할 수도 없는 위치에 서 있다. 페르버는 독일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독일 땅을 밟아본 적도 없지만 아픈 기억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영국으로 탈출시키고 끝내 떠나지 못한 부모의 죽음에 대한 단서도 찾지 못한 채, 어머니 루이자가 남긴 일기는 독일인 이웃과 다름없는 자부심을 지닌 유대인의 소박한 기억이 담겨 있다.  


(195) 어릴 때부터 익숙하던 그 빛은 밤마다 내게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맨체스터에서의 초창기를 떠올리면 얼럼 부인, 아니 그레이시가 내 방에 넣어주었던 차 만드는 기계가 내 생명을 지켜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삶에 작별을 고하고 싶은 기분에 빠질 때가 잦았다. 그 괴상하면서도 쓸모 있는 기계가 밤이면 은은한 빛으로, 아침이면 나지막하게 물 끓는 소리로, 한낮에는 그냥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내 삶을 지탱해주었던 것 같다. (203) 페르버는 용암이 흐르다 멈춘 듯한 그 물감 덩어리야말로 자신의 부단한 노력의 진정한 결과이자 명백한 실패의 증거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작업실 안의 물건들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자기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지나가듯 말하기도 했다. (204) 그는 먼지야말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임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고 했다. 먼지는 빛이나 공기나 물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각 네 편에 등장하는 노란 나비를 쫓는 나비채를 든 소년(사람)은 과연 죽음의 사신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상징일까. 이 소설의 묘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의 구분 없이 넘나드는 매력에 있으며, 그렇기에 단순한 허구도 아닌, 일회성의 기록물도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20) 그 뒤 그는 일 년 내내 거의 쉬지 않고 나비채를 든 사나이라는 얼굴 없는 초상화만 고생스럽게 그렸다. 하지만 그 그림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기묘한 영상을 전혀 비슷하게 재현해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그것을 최악의 실패작으로 치부했다. (272)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눈앞의 온 세상이 어슴푸레하게 희미해지는 것 같더니 오래전에 잊은 줄 알았던 러시아 소년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여름날, 나비채를 들고 들판을 뛰어다니던 그 소년이 행운의 사신처럼 내 눈앞에 나타나 마침내 맞이한 나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수집통에서 가장 멋진 멋쟁이류의 나비와 공작나비, 멧노랑나비, 쥐똥나무나비를 꺼내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과연 고향이란 무엇일까. 소포클래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코로스가 눈이 먼 오이디푸스에게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나는 고향이 없소"라고 말한다. 고향이 없다는 뜻은 아무것도 아니다 (nothing, 無)라는 뜻과 같다. 이 말은 곧,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네 인물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고향을 떠난 이들이다. 주로 강제적인 이유에서 고향을 떠났고 평생을 상실과 회한의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심지어 외부에 의해 고향을 뺏긴다) 그 속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의 치열한 싸움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지독한 향수에 빠져 지내는 인물도 있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도 있다. 영혼의 고통은 한마디로 무한하며, 우리 삶의 길이가 줄 위에서 보일 듯 말듯한 점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 슬픈 역사를 '나'는 사진과 기록, 일기, 여행기, 그리고 대화를 통해 추적하고 기록한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이 글을 통해 네 인물들은 자연스레 눈앞으로 소환된다. 귀 기울여 듣는 이야기들은 환상 같은 논픽션이다. 그리고 마침내 묻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나 자신에게도 물어본다. 나의 이름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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