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_당신을 위해 씌어줄 우산이 있다면 기꺼이...
연작소설이란 독립된 완결 구조를 갖춘 각각의 작품들이 연쇄적으로 묶여 있는 소설을 가리킨다. 형식적 완결성을 갖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한 편의 장편소설의 형식을 갖춘 소설이다. 인생의 한 단면을 압축된 구성으로 제시하는 단편의 장점과 인간의 삶과 그 관계의 면모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장편의 장점을 지녔다.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은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다. 우선 소설 《d》는 하루아침에 연인 'dd'를 잃은 남자 'd'의 남겨진 이야기를 그렸다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나'와 연인 '서수경' 그리고 동생 '김소리'와 그녀의 아들 '정진원'의 이야기를 읊조리듯 풀어냈다. 이 두 이야기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시간과 역사, 뜨거운 침묵과 차가운 혁명이라는 역사가 조용히 관통하며 흘러간다. 사물과 죽음, 그리고 책, 여기에 문장이 덧붙여 '나'가 쓰고자 하는 누구도 죽지 않은 이야기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이라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앞마당을 쓸고 가듯 훑어낸다.
(p.18)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p.40)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p.112)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그런 광경이 떠올라요. 분명히 있었거나 너무 있었던 것 같은 순간들이요. 그것은 모두 과거이고 정지되어 있죠. 지금과는 완전하게 동떨어지고 무관한 채로 영원히 그 뒤가 없는 것처럼...... (...)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거나 움직일 때,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죽음을 느껴요. 매우 정지된 지금을요. (...) 죽음을 경계로 이 세계와 저 세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죽음엔 죽음뿐이며, 모든 죽음은 오로지 두 개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목격되거나 목격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나요?
dd의 죽음 이후로 d의 세계는 진공이 된다. 소리도 없는 세계 안에서 d를 끄집어낸 것은 여소녀 아저씨의 빈티지 오디오이다. 소리가 곧 그를 기억으로부터, 과거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불러낸다. 그가 죽은 듯이 살아갔던 시대는 2009년 용산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침몰, 그리고 더 옛날로 거슬러 1983년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했던, 탈출의 장면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척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여소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공관의 섬뜩한 열기는 집요한 통증처럼 그의 손 끝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마치 혁명의 불씨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열기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2016년 겨울 초입의 촛불 집회를 지나 다음 이야기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선고한 정오가 막 지난 짧은 시간으로 점프한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그렇게 혁명의 전말이라 불리는 여러 사건을 기억의 소환이라는 형태로 드문드문 불러 낸다. 소설가 '나'의 입을 통해서, 혹은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한 편의 소설을 쓰듯 독백처럼 회고한다.
누구도 죽지 않은 이야기를.
책꽂이에 꽂힐 이야기 한편을 완성할 수 있을까.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나'와 '서수경'은 1996년 8월 연세대 항쟁에서 재회한다. 그로부터 20년을 그렇게 곁에서, 너희 둘은 대체 무슨 관계이냐고 묻는 타인의 시선을 묵묵히 견디며, 둘 중의 한 명이 사라진 다음에도 남은 한 사람의 생활을 보호하고, 그를 각자의 가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언젠가 그 일이 닥칠 때 서로의 유언대로 남은 삶을 품위 있게 마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두가 돌아갈 무렵에는 우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둘은 20년 뒤에도 여전히 함께 있을 것이다.
(p.206) 내 공간을 책으로 채워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성/사람이 뭔가를/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옳다. 사람에게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엔 책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p.220)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 힘이란 곧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 상태를 두려워한다. (p.273) 묵자란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언어/도구이며, 벽이며 간판이며 각종 게시판의 공지사항이며 약병에 붙은 라벨에 적힌 안내문과 주의사항과 경고와 지금 이 문장과 롤랑 바르뜨와 생떽쥐빼리와 한나 아렌트와 라울 힐베르크의 책에 잉크로 인쇄된 것들이 모두 그것에 해당하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세계의 기본적인 전제라는 것도 우리는 그때에 알았다. (p.275) 보는 이는 보지 못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가 왜 거기 있는가? 그는 고려되지 않는다. 용산역 1번 플랫폼의 상식에 그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거기 없다...... 나는 아직 그것을 볼 수 있었으므로 거기 있었지만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상식의 세계라는 묵자의 플랫폼에서, 다시 한번.
과연 상식이란 무엇이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며, 혁명이란 무엇인가. 2016년의 촛불집회부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을 선고하였다 하여 과연 세상의 혁명을 이루어졌는가. 심지어 '魔女OUT'이라는 팻말이 버젓이 광장에서 들고 다닐 때조차 여성은 묘하게 배제되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말할 필요 없는 세상 속에서 겪은 부조리와 이해 불가능의 현실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당연하듯 받은 차별과 눈물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이 거치고 살아온 흔적의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꾹꾹 밝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p.316) 누구도 죽지 않은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 언제고 쓴다면, 그것의 제목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하면 어떨까. 그것을 쓴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고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소용되지 않아,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로.
그것은 가능할까.
오후 1시 39분.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는, 나는, 오늘은 과연 어떻게 기억될까. 그 광장에 나도 있었다고,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한 뜻으로 감히 서 있었노라고 이야기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나아가는 방향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읽는 동안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으로 끌어당겼다. 그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모두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래서 굳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그같은 이야기로 문장을 곱씹으며 멈칫할 것만 같다. 그건 마치 d가 오디오의 음악에 온 몸과 마음을 내 맡겼듯이, 어떤 전기 신호처럼 저릿한 감각으로 새겨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