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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r 11. 2020

부재의 슬픔을 끌어안는 법
『슬픔은 날개 달린 법』

#19_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떠나지 않을 거야


맥스 포터 작가의 첫 장편 소설 『슬픔은 날개 달린 법』은 한강 작가님의 추천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상한 온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책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그는 서점 매니저로 근무했고, 그 후 영국의 그란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그란타 출판사는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 영문판을 펴낸 곳이고,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할 당시 편집자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가 출판사에서 일하며 틈틈이 쓴 원고를 모아 2015년 발표한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토머스 상(2016)과 선데이 타임스 올해의 젊은 작가상(2016)을 수상했으며, 최근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래니』는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동시대의 젊은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도 끌린 이유 중 하나였다. 관습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독창성을 견비한 소설을 기대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불시에 덮쳤을 때, 이 작가는 그걸 어떻게 소설로 풀어냈을까. 제목에서 읽히는 진한 슬픔의 형상, 그것의 형체와 질감을 어떤 색으로 칠했을까. 그는 새까만 날개를 단 커다란 까마귀를 끌어들인다. 






갑작스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와 두 아들 앞에 느닷없이 까마귀가 날아든다. 소설은 곧 아빠와 두 아들과 까마귀의 대화로 이루어지는데, 함께 혹은 각자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삼면화의 구조를 갖췄다. "삼면화란 절대 멈출 수 없고 멈춰지지도 않는 것"이라고 한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정해져 있지 않고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과 멈추는 곳이 끝일뿐, 삼면화의 시작과 끝은 늘 유동적이며 그리하여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음악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슬픔과 애도를 다루는 작품이 지닌 클리셰와 지나친 감상주의에서 한발 벗어나 있다. 아내와 어머니의 부재와 상실에 대해 아빠와 아들이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과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배려, 그리고 차마 묻지 못할 아픔을 풀어냈다면, 까마귀는 좀 더 대범하고 자유롭게 그들을 타이르거나 꾸짖는 방식으로 뇌까린다. 까마귀는 이들 곁에서 떠나지 않고 시종 재잘거린다. 새의 언어로 혹은 인간의 언어로, 혹은 신의 언어를 대변하는 까마귀는 그들 곁에 오래도록 머문다. 까마귀는 슬픔을 먹고살며 인간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별스러운 존재다. 


(p28) 까마귀_우린 다른 캐릭터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어. 이를테면 슬픔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비밀을 먹어치우는 일, 언어 그리고 신과 연극풍의 싸움을 벌이는 일. 나는 친구, 변명, 데우스엑스마키나, 농담, 징후, 허구, 귀신, 목발, 장난감, 환영, 익살, 애널리스트, 베이비시터였어. (...) 너희는 너희의 탄생 비화, 너희의 생물학적 진실(실수였지), 너희의 죽음(보통 모기에 물려서), 너희의 삶(기꺼이 부정되는 것)을 몰라. (...) 인간들이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를 빼면 별 재미가 없거든. 건강, 재난, 기근, 악행, 찬란한 것들 또는 정상적인 것들은 별로 내 흥미를(나의! 흥미를) 끌지 못하지만 엄마 없는 아이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엄마 없는 아이들은 순수한 까마귀야. 



 맥스 포터의 까마귀는 시인 테드 휴스의 시집 『까마귀』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됐다. 시집 속 까마귀는 전설과 신화 속의 존재이자 생명력과 혼돈이며, 신과도 대적할 수 있는 특별한 동물로 그려진다. 여기서의 까마귀 또한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생명체이지만 동시에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이 까마귀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장난도 치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다. 아버지와 아들이 슬픔에 빠질라치면 어느덧 까마귀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아내와 엄마를 잃은 사건이라는 기본 서사를 뼈대로 이 소설은 시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혹은 우화 같기도 하며 장르를 넘나 든다. 운문과 산문을 오가는 문장들은 하나의 리듬을 이룬다. 업 앤 다운되는 기분이 만들어낸 하나의 리듬은 읽는 이의 마음  또한 흔들리게 한다. 매번 읽을 때마다 여러 다양한 감정의 결로 읽힐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행간의 공백을 통해 더 큰 아픔과 더 깊은 사랑과 애정을 느낄 수 있어 슬프지만 자유롭다. 짧은 소설이지만, 한 줄 한 줄,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묘하게 더 큰 무게와 울림으로 다가온다. 


(p40) 아빠_내가 보기에는 애도와 삶,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도 동일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까마귀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p66) 아이들_우리는 가끔 진실을 말한다. 그게 우리가 아빠에게 착하게 구는 방법이다. 


슬픔은 과연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일까.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삶의 근본이다. 세상은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나긴 애도의 시간 속에서 아빠와 두 아들은 서서히 깨닫는다. 슬픔은 대체가 아닌 존재를 증명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노력이 아닌 과거를 끌어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피하기보다 담담히 슬픔과 마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불쑥 찾아왔던 까마귀는 갈 때도 역시 훌쩍 사라진다. 까마귀는 알고 있다. 이제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마음이 치유될수록 눈부신 햇살이 자리할 것을 까마귀는 알고 있다. 이제 세 사람은 과거의 부재가 아닌,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할 것이다. 



(p144) 아빠_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늦추거나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p153) 아이들_ 아빠는 늘 표류하는 사람처럼 보였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맥주 같은 금빛 저녁노을 속에서 몸을 돌렸다가 여전히 남아 있는 온기를 느끼고 놀라는 사람처럼. 앞으로 굽은 어깨와 반쯤 찡그린 어중간한 미소. 하루하루 천천히 엄습해오면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당혹스러운 슬픔에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 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분노할 수 없었다. (...) 아빠는 죽기를 바랄 수도 없었다. 만일 까마귀가 아빠에게 뭔가 가르쳐준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끊임없이 균형을 유지하는 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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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문학에 대한 애정이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제목과 소설 시작에서 드러난다. 제목은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것"에서 인용된 것인데,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계를 지닌 존재들이므로, 우리가 겪은 사랑의 무게는 오직 그 사랑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남은 자국의 깊이로만 가늠될 뿐이라는 시 (...)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고서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겪을 슬픔을 표현하는 데 이 시보다 더 적절한 인용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169) 옮긴이의 말 중에서 



또한, 테드 휴스의 첫 번째 부인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 후 긴 침묵 속에서 완성된 시집이 『까마귀』라는 것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은 테드 휴스의 연구가이며, 그가 아내의 죽음 이후 관계를 맺는 여성은 실비아 플러스의 연구가로 등장한다. (한강 작가님의 새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회 연재에도 삼면화가 짧게 언급되는데, 인선이 스스로 삼면화라 불렀던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접은 뒤, 국비 지원이 가능한 목수 학교에 지원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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