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랑

01. 너도 진짜 사랑을 해 봐

by 신화진



M은 대학에서 J를 처음 만났다. 신입생 시절, 합동 영어 회화 수업에 우연히 옆에 앉았다. J의 얼굴은 모자에 가려졌지만 긴 고수머리의 검은 뿔테 안경을 썼다. 입시 해방감에 들떠 과하게 멋을 부리던 또래와 달리 J는 수수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털털했다. 그날도 회색 사파리 등산 모자를 쓰고 감색 점퍼를 걸친 청바지 차림이었다. 스커트나 원피스를 입은 여학생 무리에서 J는 눈에 띄었다. J는 여느 신입생과 달랐다. 한결같이 수업이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졌다. M은 우연한 기회로 J와 말문을 텄지만 그게 다였다. J는 혼자 수업을 들었다. 수강신청도 주 2일에 필수전공과 교양 수업을 한꺼번에 몰아넣었다. J는 좀머 씨 같았다. 매사 바쁘고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서 그녀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M은 자주 전화했다. J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마치 낮게 흘러가는 구름 같았다.


어느 날 J와 M은 영화를 보러 갔다. J가 먼저 함께 보자고 청했다.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두 번째라고 했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강남역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영화는 나무랄 데 없이 공식적이었다. 평범한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갑자기 여자가 남자를 멀리하면서 균열이 발생하고 그걸 견디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멀어져 가는 관계를 남자 주인공은 견디지 못했다. 반면 여자는 뒤도 안 보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관계의 역설. 어쩌면 당연한, 유행가 같은 러브스토리. J는 그게 ‘진짜 사랑’ 같다고 했다. 자신의 사랑은 뭔가 특별한 줄 알지만 결국은 특별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마는.


스물한 살의 J가 스무 살의 M에게 건넨 첫 당부가 그거였다. 너도 진짜 사랑을 해 봐. 저 영화처럼. 쓰라린 아픔을 겪어 봐. 사랑이 변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감정을 느껴 봐. 그래야 성장할 수 있어. 진짜 사랑? 성장? 무엇을 위해? M은 갸우뚱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심오한 척, 다 알아먹은 것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진짜 사랑’을 찾아 나설 것처럼 각오를 다졌다. M은 J가 하는 말이면 뭐든 다 믿고 싶었다.


나 프러포즈받았어.


서른한 살의 J가 서른 살의 M에게 영상통화로 알린 첫마디가 그거였다. J의 손가락에 약혼반지가 반짝였다. 내 결혼식에 올 거지? M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가겠다고 했다. 6개월 뒤에 있을 결혼식을 위해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J의 결혼식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변덕스러운 봄바람에 발목이 시렸다. 황금빛 초록이 넘실대는 와이너리는 그야말로 풍요였다. 질 좋은 호주산 스테이크와 무한정 제공되는 고급 와인까지, 장소부터 식사 메뉴, 음악까지 신랑 신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건 무엇 하나 없었다. J는 서른 명의 지인 앞에서 백인 남편과 결혼 서약을 맹세했다. 하얀 웨딩드레스는 순결했고 빨간 부케는 강렬했다. 보랏빛 화관을 쓴 M은 신부의 들러리가 되어 J의 행복을 빌었다. 너는 진짜 사랑을 쟁취했구나. 앞날의 파국도 모른 채 J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답게 사랑하세요.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M의 축사에 J는 눈시울을 적셨다. 결혼식 내내 신랑이 직접 고른 음악이 실내를 꽉 채웠다. BTS의 버터 다음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자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신부가 플로어 한가운데서 말춤 포즈를 취했다. 하객들의 열렬한 호응과 함께 “오빤 강남 스타일” 후렴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모두가 서로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기차처럼 열을 지어 둥글게 춤을 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