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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y 08. 2016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서평 03_호모 아키비스트, 기록하는 사람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p.302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과 같다.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형태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정희 님의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는 내 안의 잠재되어 있던 호모 아키비스트를 자각시켜 준 책이다. 유달리 기록하고 메모하고 필기하는 것을 좋아했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 한 페이지의 몰스킨 일기를 쓰고 있고, 그것도 부족하여 스케쥴러에 꼼꼼히 과거, 현재, 미래의 일과를 깨알처럼 박아 놓는다. 수십 년 동안 간직한 다이어리와 스케쥴러, 편지 등은 지금도 책장 한편을 꼿꼿하게 차지하고 있는 유물이다.


내 손으로 버릴 일도 없지만, 버릴 마음조차 품지 않았다. 한 낱 종이에 씌여진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기록들이 사라진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고 단언해 본다. 세밀한 눈으로 세상 밖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관찰해 왔다. 때로는 그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꼼꼼하게 하루의 일상을 거칠게나마 글로써 다듬고 위로해 왔다.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에서 납작 엎드린 채 기어야만 했던 시기도 있었다. 낭떠러지 절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누구라도 도와주기만을 절실하게 바랄 때도 멈추지 않고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타인이 개입되지 않은 온전한 기록들이 사유가 되고 성찰이 되고 반성이 되어 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작가가 된다. 이야기하기 위해 산다기보다 삶이 이야기다. 사람살이에 귀를 기울인다. 마음을 의지한다. 더불어 살아간다"


북큐레이터 안정희 작가는 서울 도서관 등을 비롯한 100여 개 도서관에서 책과 책 읽기에 대해 강의를 하며 도서관 북큐레이터 양성과정 프로그램을 기획, 강의하고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 연구소 '국경을 넘어서는 역사 대상 어린이 청소년 역사책'의 심사위원, 도서문화재단씨앗의 에코라이브러리 장서개발 및 주제도서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계간지 '도서관, 말을 걸다'에서 '미술관 옆 도서관'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호모 아키비스트,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국내는 아직 낯설기만 한 전문 직종인 아키비스트는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공공기록물 관리법에 따른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라고 한다. 공공 기록물 이외에도 일상에서도 아키비스트는 활동하고 있다. 기록물을 직업적으로 다루지 않아도 기록하는 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말하는 사람 역시 아키비스트이며, 실상 우리 모두가 기록하는 자, 아키비스트이다.



p.12


아카이브(Archive)는 정부의 기록, 공문서의 의미였다가, 지금은 '기록'이나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누구든 어디서든 기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으니, 우리네 삶의 일상을 담은 기록물이 지닌 가치를 돌아보고 기록물의 내용과 성격에 따른 관리, 폐기와 공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다.


(중략)


기록하고 기록물을 살피는 행위는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다. 기록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기록은 살아가는 목적이자 방법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불멸을 꿈꾸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 인간은 누구나 작가를 꿈꾼다. 개인 기록물의 공공성은 기록이 공유 기억을 만드는 토대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류'가 될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저만의 방법으로 자유롭고 다양하게 글을 쓰고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 기록물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 보존과 폐기를 결정하는 과정 속에서 '개인의 나'와 '사회적 나'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이를 통해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진다. 보통 사람들의 기록물에서 공공성을 파악하는 일은 개인에게서 인류를 발견하는 일이며, 인류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쓰는 나'와 '관리하는 나'를 구분해야 한다. 즉, 아키비스트가 되어야 한다. 기록물로부터 거리감을 확보 해 놓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기록은 목소리를 가져야 하고 그 소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 아카이브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기억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 스토리텔링의 시대 : 부모가 자식에게 전달하고 물려주는 유산 중에 '말'이 있다. 과거의 이야기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며,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이유,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 받아들여 미래에 남길만한 자신만의 스스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 : 앞선 세대의 기록으로부터 과거를 배우고 타인의 삶을 참고로 내 인생을 살아간다.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살아남은 자들은 기억을 경험하고 공유해 나가야 한다. '세월호 사건' 역시 잊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 경험을 책을 비롯한 기록물로 남기고 세월호 기념관처럼 상징과 동시에 실제적인 기록관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인간의 의지가 '지워서는 안될' 기억을 선택한다. 기억과 경험은 사회적 공유의 주춧돌을 세운다. 그 시작이 기록이며 보존하고 읽혀야만이 비극은 잊히지 않고 되풀이되지 않는다. 진실이 왜곡되기 전에 기록해야 할 많은 사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생활의 기록이 필요한 시대 : 일상의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기록은 권력이 있는 곳에 남겨지고 왜곡, 삭제, 재구성되어진다. 역사는 결국 해석이고, 해석은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기록은 그 존재를 드러내게 하며, 미시적 기록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호박 목걸이', '산파 일기'처럼 지루하고 지난한 소소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당대 배제된 여성, 하층민들의 삶과 관점, 노동자들의 일상을 파악할 수 있다.


- 공유가 필요한 시대 : 사람은 언제 글을 쓰고 기록하는가. 상처받은 인간은 기록하면서 자신을 치유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사회의 문제로 공동의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파괴될 수 있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처럼 상처는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어간다. 실제 재판 결과를 소설화하였고, 그 안에서 차별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폭력 대신 배려와 관용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작가는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아키비스트이다. 사건 속에서 중요한 기록을 선택하고, 폐기 및 가치 부여, 재생산하는 기록 관리의 행위를 통해 다양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였고, 전 세계인에게 차이와 관용의 문화, 사회적 기억을 창조해냈다.  


- 문화 다양성의 시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을 자신 안에 가둘 때, 그것은 곧 깊은 상처가 된다. 그 기억을 사회의 기억으로 환원하고 공유 기억으로 재생하여 잊어서는 안될 기억의 역할로 성찰해야 한다. 다양한 문화, 고유한 경험을 축적하여 인류 생존의 근원을 기록으로 순간 포착하고 꿈을 꾸며 실현해 나가야 한다.


- 기록 과잉의 시대 (선택과 보관 그리고 폐기) : 모든 것을 기록하는 일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기록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어떤 기록을 폐기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기록의 분류와 폐기는 삶의 가치를 되묻는 작업이다. 기록보다 폐기가 더 어려운 작업이며, 결정하기가 어렵다면 일단은 분류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떤 기록을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리킨다. 수많은 기록에서 나의 생각과 깊이를 더해 나가지 않는다면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서 자기 과시나 일시적 소비로만 남게 된다. 결국 기록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기 고민의 시간이 빚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p.201


다른 이들도 이 글을 읽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시작하면 좋겠다. 에필로그에 실린 내 아버지의 사진이되 나의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듯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 기록물 안에서 사회 공공적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고르거나 가치를 부여하거나 재해석해서 광장으로 가져 나와 이야기를 들려주길 희망한다. 상처를 드러낼 때 반드시 그 손을 잡는 이가 있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영화로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거나 디지털 기기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가 출발한다. 상처가 기록이 되고 기록이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도록 이제, 아카이브를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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