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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y 30. 2016

카슨 매컬러스의 고딕 소녀

#04_한철의 시간을 통과해가는 사춘기 소녀의 고독 그리고 ...

미국 남부 고딕 문학을 대표하는 카슨 매컬러스의 고딕소녀는 기형에 가깝도록 긴 팔과 긴 다리를 가진 거구의 12세 소녀 프랭키의 성장통을 감수성 넘치게 예민한 필치로 그려낸 소설이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기괴할 수도 있는, 날카로우면서도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한 12세 소녀의 꽃같은 한 철을 기이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고 있다. 총 3부작으로 이어지는 소설은 1부는 프랭키로, 2부는 F. 재스민으로, 그리고 3부는 프랜시스로 한 주인공을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출하고 있다. 마치 이름만 달라져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발상이 아이처럼 천진하다. 이 모두가 8월이라는 시간과 여름이라는 계절을 통과한 소녀의 시선에서, 갑작스러운 일상의 변화를 마주하고, 그 나이의 알 수 없는 의문과 호기심이 열병처럼 무섭게 퍼져나가는 경험이 때론 사소하고 때론 눈이 부시다. 사춘기 시절의 유령 같은 모험은 그 시절이 간직한 은밀한 비밀과도 같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일상의 고독을 암시하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때의 기억으로 남겨진다.



갑자스러운 오빠의 결혼식 소식에 놀란 프랭키는 참석 전날 결심한다. 오빠의 신혼여행에 본인도 동참하여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그녀의 일상은 흑인 가정부 베러니스와 가장 가까운 사촌 동생 존 헨리와 부엌에 모여 음악을 듣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다. 다름없는 매일의 따분함을 탈출하여 새로운 모험을 떠나고 싶은 어린 소녀의 마음은 오빠의 결혼식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동시에 블루문에서 만난 군인의 파란 눈동자와 금발은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데 ... 


느릿느릿하게 이어지는 부엌 안 세 인물의 대화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모습과 흑인들의 곤궁한 삶의 무게, 베러니스의 전 남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라는 모순된 감정과 불가해(不可解), 그리고 왜 내가 네가 아닌 나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 신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아이를 타이르는 어른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드러난다. 또한, 소녀의 계획은 실패할 것을 일찌감치 예상한 독자라면 가출하거나 몹쓸 일을 당할뻔한 프랭키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사춘기를 반추하게 될 것이다.


이밖에도 해가 뜨는 아침과 햇살이 비껴가는 나른한 오후, 어둑어둑해질 무렵의 정경들을 묘사한 장면들은 한 편의 그림처럼 상상의 최대치를 끌어올린다. 글과 말이 음악이며 그림이라는 것을, 삶의 재현으로 다른 의미의 무게와 슬픔을 전해준다. 동시에 소녀의 마음을 세세하게 건드리는 묘사와 사촌 동생의 죽음과 세계 여행이 실패로 끝나는 장면을 한 문장으로 냉정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내공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매컬러스는 "미완의 노래처럼 인간 존재의 즉흥성을 의식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 작품 또한 음악과 소설의 의미 있는 결합을 함축하고 있으며 3부로 나뉜 전체 구조가 교향곡의 악극 형식을 연상시킨다. 마치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프랭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음악의 일부로 비유해주고 있다. 가령 1부 오빠의 갑작스러운 결혼식 소식은 8월 내내 부엌을 채우던 라디오 소리가 꺼지면서 정적으로, 2부의 프랭키가 벌이는 시내의 모험은 갑자기 들렸다 사라진 오르간 소리의 이끌림으로, 3부는 새 친구를 맞이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프랭키의 행복감을 벨소리로 부엌 안의 침묵이 깨지는 상황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이처럼 언어, 말, 대화는 소설을 이루는 노래이면서 조화로운 음악이다. 12세 소녀가 겪는 성장통,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지루한 일상의 외로움과 미지로 향해 뻗어 나아가고 싶은 동경이 가득한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의 사건들. 뻔하디 뻔한 삶의 일부를 이토록 아름답고 섬광처럼 빛나게 표현할 수 있다면 같은 주제의 소소한 변주들을 통해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잘 짜인 구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카슨 매컬러스는 15세의 열병과 뇌졸증으로 서른 살 초기까지 육체가 주는 한계와 고통을 극복하고자 병이 커질수록 더욱 강한 모습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주로 미국 남부를 무대 삼아 평범한 일상과 세계관에 순응하기 힘든 소외된 영혼의 열망과 고독을 주제로 탁월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주관적 주석이 배제된 담담하고 절제된 그녀의 문장들은 병적으로 예민한 인간의 감수성을 파고드는 데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며, 미국 여성 문학을 대표하는 고딕 문학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고딕 문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영국에서 유행한 문학 사조로써 중세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을 배경으로 유령, 살인 사건을 주제로 신비감과 환상을 다루던 문학이다. 이것이 미국 남부로 건너와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고, 남부 고딕 문학은 미국 남부 지방의 일상적이고 전형화된 공간을 배경으로 괴이하고 비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을 결합한 독특한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1946년 발표된 고딕소녀는 50년과 51년 연극으로 각색되어 무대에 섰고, 뉴욕극비평가협회상과 두 번의 도날드슨 상을 받았다. 또한, 1952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영화로, 82년에는 TV 드라마로, 97년에 다시 한번 안나 파킨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1부


집에는 베러니스 새디 브라운과 존 헨리 웨스트뿐이다. 이들 셋은 부엌 식탁 앞에 앉아서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며 반복한다. 매일 오후는 죽은 듯이 보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8월 마지막 금요일 갑자기 모든 것이 한 통의 연락으로 바뀌고 만다. (...) 베러니스는 피부가 매우 검고, 어깨가 넓고 키가 작은 요리사이자 보모일 것이다. 왼쪽 눈이 밝고 파란 유리라는 점만 빼면. 존 헨리는 피를 나눈 가장 가까운 사촌이다. 가장 커다란 무릎을 갖고 있는 자그마한 몸집의 절대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들은 칙칙하고 추한 부엌에 함께 앉아 늘 그렇듯이 카드놀이에 골몰해 있다. 마치 정신병원의 환자들 방처럼 그 부엌은 프랭키를 신물 나게 한다.


: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지만, 자신의 쥐어짜진 심장이 식탁 모서리에 눌려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p.50


그녀는 너무 어렸다. 프랭키는 적십자라는 단체에 엄청나게 화가 났고, 그때부터 모든 일에 관심을 놓아버렸다. 전쟁과 이 세상은 너무 빠르고 거대하고 이상했다. 이 세상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면 겁이 났다. 그녀는 독일인이나 폭탄이나 일본인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에서 그들이 그녀를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겁이 났고 이 세상이 어쩐지 그녀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p.51


그래서 그녀는 이 동네를 떠나 어디 먼 데로 가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해에 지나간 봄은 나른했고 너무나 달콤했었다. 길고 긴 오후는 꽃처럼 피어나서 지속되었고 푸르른 달콤함은 지겨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마을이 프랭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슬프고 끔찍한 일들이 프랭키를 울게 만들었던 적이 전엔 결코 없었지만 이젠 많은 일들이 프랭키를 갑자기 울고 싶게 만들었다. 그녀는 때때로 아주 이른 아침에 마당에 나가 오랫동안 서서 동트는 하늘을 바라다봤다. 마치 의문 하나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듯했고 하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전엔 거의 관심조차 없던 저녁나절 길가에서 바라다본 집 안의 불빛들, 뒷골목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목소리 같은 것들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그 불빛들을 쏘아보고 목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면 그녀 안의 무엇인가가 응어리지면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불빛들은 어두워지고 목소리는 잠잠해졌다.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누군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려 하는지, 그리고 왜 그 순간에 불빛을 보며 혹은 소리를 들으며 혹은 하늘을 쏘아보며 혼자서 서 있으려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그녀는 무서웠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느꼈다.


p.52


시내를 돌아다녔지만,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은 어쩐지 미완으로 남겨진 것 같았다. 그녀 안의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를 서둘러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항상 잘못되었다. (...) 혹은 창백한 봄날 석양이 저물고 달콤 쌉쌀한 먼지와 꽃내음이 대기에 찼을 때, 창문마다 불을 켜는 저녁나절에, 저녁밥 먹을 무렵 기나긴 전화통화를 할 때, 굴뚝 칼새들이 날아들어 동네 위를 빙빙 돌다가 어딘지 모를 제 고향으로 떼 지어 날아가버렸을 때, 그래서 하늘은 텅 비고 넓어졌을 때, 이즈음의 긴 석양이 졌을 때 시내의 보도 위를 걷다가 슬픈 재즈음악에 신경 끝이 떨리고 가슴속이 딱딱해져 거의 숨이 멎을 것같이 되었을 때.



2부


p.95


그날은 토요일로 그녀는 시내에 나갔는데 갑자기 그 꽉 막히고 텅 비었던 여름이 끝나고 시내가 그녀 앞에 열렸고, 전혀 새롭게도 그녀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결혼식 덕분에 F. 재스민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연결되었고, 이 토요일에 시내를 돌아다니는 그녀는 갑자기 세상의 한 멤버가 된 그녀였다.


p.97


그녀가 새벽에 깨었을 때 그날은 시작되었다. 마치 오빠와 신부가 밤새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함께 잠들었던 것 마냥, 잠에서 깨자마자 그녀는 결혼식에 대해 생각했다. (...) 세상을 가르는 검은 밤이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 열두 해를 사는 동안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바로 그 순간에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한 밤 자고 다음 날이 되면 그 변화는 더 이상 그다지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곤 했다.


p.144


그날 오후는 베러니스가 지난 월요일에 구운 실패한 케이크의 가운데 부분 같았다. 이전의 프랭키는 케이크가 실패하면 좋아했었는데, 마음이 비뚤어져서가 아니라 이렇게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케이크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운데 부분의 촉촉하고 끈적끈적하며 풍부한 맛이 좋았고, 왜 어른들이 이런 케이크를 실패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월요일에 구웠던 케이크는 가장자리가 가볍게 높이 솟았고 가운데가 촉촉하면서 완전 푹 꺼진, 막대 모양이었다. 밝고 높았던 아침이 지나고 오후는 마치 케이크의 한 가운데처럼 짙고 단단했다.


p.146


할아버지는 마치 검색 나무를 깎아 만든 노인을 시트로 덮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움직이는 건 눈동자뿐이었는데, 마치 파란 젤리 같았다. 그 눈들은 파랗고 촉촉한 젤리처럼 안구에서 나와 그의 뻣뻣한 얼굴 뒤로 또르르 굴러내릴 것 같았다. (...) 식구들은 마침내 할아버지가 창가로 비치는 햇빛에 대해 불평했지만 사실 그것도 할아버지를 그토록 괴롭혔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것은 죽음이었다.


p.164


고요한 가운데서 그들은 어떤 음조가 부엌을 조용히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들었다. 같은 음조가 반복되었다. 피아노 소리였다. 피아노 음계가 8월 오후를 비껴 지나가다. 화음이 잡혔다. 꿈꾸는 듯이 일련의 음계가 차례대로 마치 성벽 계단을 오르듯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나 바로 마지막 여덟 번째 음계가 울려야 할 시점에서 멈추어버렸다. 그리고 이 마지막 직전의 음이 한 번 더 울렸다. 모든 미완의 음계의 메아리 같은 이 일곱 번째 음은 자꾸만 자꾸만 반복해서 울렸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p.214


"이름을 바꾸면 왜 법에 어긋나?"

"생각해보면 알지. 그저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난 모르겠어"

"네 목 위에 달린 건 뭐냐?" 베러니스가 물었다

"난 그것이 머리라고 생각하는데. 생각해봐. 내가 갑자기 일어나서 나 자신을 엘리노어 루스벨트 부인이라고 부르면 어떻겠어. 넌 스스로를 조 루이스라고 하고, 존 헨리는 자기가 헨리 포드라고 주장한다면 말이야. 도대체 어떤 혼란이 일어나겠냐고."


p.215


"네가 이름이 있으면 이런저런 일들이 너에게 일어나게 되고, 네가 여러 행동들을 해서 곧 네 이름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단 말이야. 이름 주변에 뭔가가 쌓인다고. 그게 나쁜 것들이면 넌 나쁜 평판을 갖게 되는 거구, 거기서 점프하듯이 이름 밖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어. 그게 좋은 것들이면 넌 좋은 평판을 갖게 되어서 만족스럽고 행복해지겠지"


p.218


"들어와. 내가 말하려던 건 이거야. 나는 나고 아줌마는 아줌마인 게 이상하지 않아? 나는 F. 재스민 애덤스이고, 아줌마는 베러니스 새디 브라운이야. 우린 일 년 내내 똑같은 부엌 안에서 서로 바라보고, 만지고, 함께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나고, 아줌만 아줌마야. 난 나 아닌 다른 게 될 수 없고, 아줌마도 아줌마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아줌마도 이런 게 이상해?"


이것 봐. 내가 초록빛 나무를 봐. 내 눈엔 초록빛이야. 아줌마도 그 나무를 초록빛이라고 하겠지. 초록빛이라는 것에 우리 둘 다 동의할 거야. 하지만 아줌마가 초록빛이라고 보는 색깔이 내가 초록빛이라고 보는 색깔하고 똑같을까? 아님 우리 둘 다 검은색을 바라본다고 하자. 아줌마가 검은색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검은색이라 하는 것이 똑같은 검은색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난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대강은 알 것 같아. 우린 모두 어떻게든 구속되어 있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태어나는데, 왜 그러는지는 몰라. 하지만 어쨌든 구속된 거지. 난 베러니스로 태어나고, 넌 프랭키로 태어나고 쟨 존 헨리로 태어나고. 어쩜 우린 이걸 좀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싶은지도 몰라. 하지만 뭘 하든 그냥 갇혀 있는 거니까.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쟤는 쟤고 말이야. 우리 각자는 다 자기 안에 갇혀 있다고나 할까. 이게 바로 네가 말하려고 하던 거니?"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난 갇혀 있고 싶지 않아"


"그런데 이런 것도 있어. 아줌마도 이런 걸 생각해봤을까. 여기 우리가 있잖아, 바로 지금 말이야. 이 순간에. 지금.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 이 순간은 지나가버려. 그러곤 다신 안 올 거야.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신 안 와. 가버리면 가버리는 거야. 이 세상의 어떤 힘도 그걸 다시 되돌려놓을 수 없어. 그건 이미 갔어.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베러니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부엌은 이제 캄캄했다. 그들 셋은 찰싹 붙어서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게 시작되었다.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울기 시작했다. 정확히 똑같은 순간에, 종종 이런 여름날 저녁에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때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시작을 했다. 그해 8월 어두워지면 종종 그들은 갑자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도 하고 슬릿 벨리 블루스 같은 곡을 부르기도 했다. 때로는 노래를 부를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서, 서로 화음을 이루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으로 꼽고 싶은 부분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이 세 명의 대화는 어느 누구라도 한 번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수수께끼, 혹은 존재의 본질에 관한 가장 원시적인 질문을 건드리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너가 될 수 없으며, 너는 왜 나로 불리지 않는가" 유치할 수도 있는 질문을 사춘기 소녀의 입을 통해, 그리고 흑인 가정부의 입을 통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답답함과 무지를 깨닫고 서로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 왜 우리가 함께 울어야 하는지, 왜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감정, 분위기. 읽는 이로 하여금 함께 울고 싶어 지게 만드는 장면 묘사와 흐름이 압권이다.



3부


p. 293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이 공허함 밑바닥에서 묵직한 어떤 것이 내리눌러 그녀의 속을 멍들게 했고, 아픔이 느껴졌다. 어서 서둘러 발을 움직여 여길 떠나야 한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감고 머리를 뜨뜻한 벽돌담에 대고 그녀는 거기 서 있었다.


p. 306


존 헨리는 뇌막염에 걸렸고 열흘 뒤에 죽었다.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프랜시스는 단 한 순간도 진지하게 그가 죽을 것이라고 믿어본 적이 없었다. 시절은 황금의 날씨와 샤스타데이지와 나비 떼가 노니는 시절이었다. 공기는 청명했고, 날이면 날마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빛이 가득한 야트막한 파도 빛깔의 하늘이었다.


p.309


프랜시스는 몸을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거의 다섯 시가 다 되었고, 하늘의 붉은 제라늄 빛은 옅어지고 있었다. 창백한 마지막 빛이 사그라지고, 수평선에 찬 기운이 돌았다. 어둠은 한번 오기 시작하면 무척 빨리 다가들었다. 마치 겨울철에 그런 것처럼. "난 진짜 좋아, 뭐냐면..... " 그러나 그 말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울리는 벨소리에 그녀가 즉각 놀라며 행복감으로 차오르느라, 부엌 안의 침묵이 깨졌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앙리 까르띠에의 잠자는 여인(sleeping woman)

*열림원 고딕소녀의 역자 후기를 일부 참고하여 쓰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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