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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un 27. 2016

카프카의 변신

#05_놀라운 소설의 모티프, 마술적 리얼리즘을 실현한 한 편의 이야기

 "어느 날 아침, 잠자던 그레고르 잠자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 문장이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툭,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서늘하게 시작하는 소설이 어디 또 있을까. 그 뒤를 바싹 쫓듯 이어지는 문장들 역시 충격적이다. 


 "각질로 된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밑으로 하고 위를 쳐다보며 누워 있던 그가 머리를 약간 쳐들자,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갈색의 배가 보였다. 배 위에는 몇 가닥의 주름이 져 있고, 주름 부분은 움푹 패여 있었다. 그 배의 불룩한 부분에는 이불의 끝자락이 가까스로 걸려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았다."


 마치 현실이 꿈처럼, 꿈이 현실처럼 주인공이 겪은 사건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단단하게 머리 속으로 파고든다. 꿈이길 바라고 싶은 악몽이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는 한 마리의 벌레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비참하리만치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만이 눈 앞에서 허공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유대계 독일 작가로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추구한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이다. 무력한 인물들과 그들에게 닥친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20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불안과 소외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며 마술적 리얼리즘을 매혹적으로 풀어낸 작품들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일궈냈다. 

 

 중간계급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권위적인 아버지 아래 고통받은 일화는 익히 알려져 있다. 잇따른 동생들의 죽음을 목격한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문학과 예술사에 흥미가 있었으나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을 전공하여 보험 회사에 입사하였다. 그 뒤,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로 자리를 옮겨 법률 고문으로 근무하는 한편, 퇴근 후에는 밤늦도록 글을 썼다고 한다. 이 무렵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하여 무자비한 관료 기구의 비인간성은 물론, 노동자들의 가혹한 대우와 그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는 곧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관찰되어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을 그의 작품을 통해 잘 시사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벌레도 변해 버린 그레고르 잠자 역시 카프카의 또 다른 분신일 수 있으며, 100년이 지난 지금 현대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초상화,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실체 없는 거대한 조직의 부품이 되어 밤낮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노예처럼 살고 있는, 벌레만도 못한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들. 그들은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벌레가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나의 꿈이 아닌 타인의 꿈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단지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죽이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부모의 빚을 갚고, 사랑하는 여동생이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모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온 몸이 부서져라 혹사했던 주인공 잠자는 끝내 가족의 차가운 질책 속에서 아버지가 던진 한 알의 사과를 몸에 박은 채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 죽음보다도 더 안타깝고 비극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다. 


 벌레로 변했음에도 헐레벌떡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온 몸을 비틀면서 일어나려고 애썼던 모습, 가족들도 얼른 일어나라고 재촉하며 문을 두드리는 장면, 급기야 직장 지배인까지 쫓아와 고래고래 협박하며 그를 압박하는 모습. 


 이는 곧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과도 같다. 벌레로 변했음에도 정신은 샐러리맨의 자세를 고수하며 출근 걱정부터 한다. 사회적 틀 속에 갇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생각하기보다는 타성에 젖어 근원적인 질문조차 잊고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제기랄! 나는 어째서 이렇게 고된 직업을 선택했을까! 날이면 날마다 출장 또 출장이다. 사무실에서의 근무도 여러 가지 귀찮기는 하지만, 외관에 따르는 고충은 훨씬 더 각별한 것이다. 기차 시간에 대한 걱정과 불규칙하고 무성의한 식사,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진정으로 가까워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중략) 


 사람이 너무 일찍 일어나면 이렇게 멍청해지는 법이야. 사람은 충분한 수면이 꼭 필요한 법이야. 다른 외판원들은 마치 후궁의 궁녀들처럼 지내고 있지 않은가. 가령 내가 밖에서 한 가지 일을 끝내고 오전 중에 숙소로 돌아와서 주문받은 것을 정리하고 기입해 둘 때에서야 비로소 그들은 아침 식사를 시작하지 않던가. 만약 내가 사장 앞에서 그런 짓을 한다면 그는 나를 당장 해고시킬 거야. 그런 생활이 이로운지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여유 있게 살고 싶어. 부모님만 아니라면 이렇게 참고만 있지는 않았을 거야. 벌써 사표를 던지고 말았을 걸. 사장 앞으로 걸어가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그는 놀라서 책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리라. 하여튼 책상 위에 걸터앉아 어깨너머로 사원들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는 것이라든지, 귀가 멀어서 말할 때마다 사원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는 등 매우 이상한 버릇의 소유자야. 그러나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부모님이 진 빚을 청산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은다면_아마도 5,6년은 걸리겠지만_그렇게만 된다면 꼭 결행할 테다. 그것이 내 일생일대의 전환기가 되겠지. 

 

 그것은 그렇다 치고, 우선 지금은 일어나야만 돼. 기차는 5시에 출발하니까. 



 

 총 3장으로 구성된 변신의 1장은 잠자가 벌레로 변하면서 겪는 가족들의 충격적인 반응에 집중하고 있다면, 2장과 3장은 그 후의 가족들의 모습과 변화를 심리적 리얼리티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며 끝까지 독자들의 관심을 붙잡아 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주인공을 차갑게 대하는 가족의 모습은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의 변화는 다른 곳에서 생겨난다. 잠자에게만 의지했던 부모와 여동생이 무기력한 삶에서 깨어나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일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수동적이며 경제적으로 의탁하고 정신적으로 의존해 왔던 가족들이 비록 살림이 더욱 곤궁해지지만, 독립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잠자의 존재 목적도 전복한다.  


 가부장적인 가족주의 아래 사랑은 헌신이라고 믿어왔던 이들에게 이와 같은 가족의 변화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다. 사랑은 헌신이 아니다. 사랑은 무언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가족 또한 그러하다. 가족을 위하여 고생한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진정으로 가족을 위한다면 내버려 두는 것 또한 방법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이 사람이 정말 내 아버지란 말인가? 옛날의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일찍 출장을 떠날 때면 침대 속에 축 늘어져 자고 있었고, 저녁에 출장에서 돌아오면 잠옷 차림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그를 맞이했었다. (중략) 그런 아버지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항상 그랬던 아버지가 지금은 단정한 자세로 똑바로 서 있다. 은행 수위와 같은, 몸에 잘 어울리는 금단추가 달린 감색 제목을 입고 있었으며, 저고리의 칼라 부분 위로 나온 턱은 두 겹으로 겹쳐 있다. 새까만 눈썹 밑에는 생기 있고 초롱초롱한 눈이 번쩍였다. (중략) 


 출장 중, 어느 싸구려 호텔에서 칙칙한 침대 속에 지친 몸을 던져야 했던 시절, 그레고르는 항상 부러운 눈으로 자기 집 거실에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식구들의 모습을 그리워했던 것인데, 지금 눈앞에 그들은 옛날의 그 생기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냥 잔잔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 평소와 같이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고, 어머니는 등불 아래에 몸을 내밀고 얼마 전 가게에서 맡아 온 고급 속옷을 바느질하고 있었으며, 점원이 된 누이동생은 좀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저녁엔 속기술과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여전히 잠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본능에 적응하여 쓰레기와 오물을 먹고 벽을 기어 다니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구석 혹은 어둠 속에 숨어 가족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유일한 소일거리다. 초반의 충격에 빠진 가족 역시 더 이상 잠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집안 형편은 더욱 빠듯해지고, 각자가 일자리를 구하고, 결국은 하숙을 치게 된다. 하숙생들 요청에 따라 바이올린을 키게 된 여동생을 보며 잠자는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 귀를 기울인다. 


 누이동생은 여전히 아름다운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고개는 한쪽으로 기우뚱하고, 눈은 마치 무엇을 음미하듯 슬픈 표정으로 악보를 훑어내리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조금 더 앞으로 기어갔다. 가능하다면 누이동생의 시선과 마주치기 위해 머리를 마룻바닥에 딱 붙어 버릴 정도로 낮게 수그렸다. 이토록 음악 소리에 감동을 느끼는데도 내가 아직 동물이란 말인가? 그레고르는 자신이 동경하는 마음의 양식을 얻는 길이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누이동생의 곁에 가서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누이동생에게 자기 방으로 와서 바이올린을 연주해 주기를 바란다는 그의 희망을 알릴 생각이었다. 


 벌레로 변하고 나서야 잠자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여동생의 연주를 듣고 감동한다 하여 과연 그를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이제까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도 잊고 살아온 잠자는 가족이 없는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벌레보다 나은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려야만 해요" 

하고 누이동생은 아버지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는 기침 때문에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저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할 거예요. 어쩐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모두 이렇게 고생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 처지에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끝없는 골칫거리를 집 안에 두고 참을 수가 있겠어요? 저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자아, 이제는 어쩔 셈인가?'하고 그레고는 스스로에게 물으며,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 가느다란 다리로 기어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쾌감까지 느껴졌다. 물론 저닌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도 이내 가라앉았고 마침내 완전히 통증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등에 박힌 썩은 사과며, 부드러운 먼지에 사여 있는 그 주위의 염증조차도 이미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애정과 연민을 갖고 가족들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누이동생보다도 그 자신이 훨씬 더 절실한 것이었다. 그레고르는 교회의 종소리가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이처럼 공허하고 편안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창 밖이 훤하게 밝아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문득 그의 머리가 그도 모르게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여동생의 부정보다도 잠자는 이미 자기 자신을 절실하게 부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명상에 잠긴 듯 평온한 죽음을 받아들이며 소멸한다. 충격적인 첫 문장만큼이나 충격적인 결말이다. 잠자는 죽었고,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끼며 다 함께 오랜만의 외출을 만끽하며 새로운 꿈과 계획에 부풀어 있다. 


 과연 어느 누가 이 가족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혹은 당신이라면 잠자를 덮어놓고 무조건 동정하며 옹호할 수 있겠는가. 1915년, 백 년 전에 이미 카프카는 인간과 가족,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한 실존적 문제를 벌레라는 메타포를 통해 통렬하게 까발리고 비판하며 우리들 눈 앞에 선명한 자국을 심어 놓았다. 우리는 곧 한 마리의 벌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인간이라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존재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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