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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Feb 23. 2017

다나베 세이코의 여자는 허벅지

#06_야하고 적나라한 이야기가 어쩜 이렇게 바삭할 수가 있죠?

p.268

"처음 여자를 알게 됐을 때 가장 깜짝 놀랐던 게 뭐예요? 가르쳐 주세요"
"허벅지였습니다"
"허벅지?"
"아, 여자의 허벅지가 이렇게 굵은 것이로구나. 처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굵고 하얬어요."
:
"아니, 날씬한 아가씨였는데 밖에서 만나 보면 바로 옆에서 봐도 잘 모릅니다. 다리를 들어 올렸을 때 정면에서 봤는데 어찌나 굵고 하얗던지......."


이 책의 제목과 동일한 소제목으로 실린 <여자는 허벅지> 편에서 동창생에게 작가는 물어본다. 알듯 모를 듯한 그 대답이 선뜻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서술했지만, 이미 머리 속에서 제멋대로 이상야릇한 상상으로 뻗어나가 야한 농담처럼 귓불이 간질간질해진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소설집을 먼저 읽었지만 사실 기억에 남는 건 동명 영화의 컷들 뿐이었다. 연애 소설의 대가로만 친숙한 작가의 이름, 다나베 세이코는 1927년 생, 오사카 출신이다. (무려 27년생이다) 여자의 마음을 세심하게 그려내는 연애 소설의 일인자로 정평이 나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여자는 허벅지>를 읽으며 '아, 에세이도 이렇게 맛깔스럽게 쓰는 작가였구나!', 머리 위로 전구 불빛이 반짝, 켜지는 걸 느꼈다. 


무려 1971년부터 1990년까지 20년 동안 주간지 <슈칸분슌>에 칼럼을 연재했고, 이후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가모카 시리즈' 단행본만 15권이 발매됐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1977년까지 연재된 내용을 골라 엮은 칼럼 에세이가 <여자는 허벅지>이다. 당시 사회, 여성, 문화, 정치를 아우르며 인간의 인생과 성(性)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특유의 유머와 풍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톡톡 건드리며 기발한 비평과 통찰력을 버무려 놓아 가려운 곳이 절로 시원해진다. 단연코 오사카 출신답게 괄괄하면서도 솔직하고 직설적이면서 굳이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면 또한 베포가 느껴진다. 


'조몰락거리는 여자', '남자의 3대 쇼크', '여자의 3대 쇼크', '뒷마무리', '불순함을 권장함', '배 나온 남자의 정감', '계약결혼' 등의 소제목들만 봐도 궁금증을 유발한다. 여기에 '내 사랑 조선인' 편을 보면 당시 오사카의 재일교포들의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한국인보다 조선인이 더 입에 붙는다고 했다. 한국 남자들의 법접할 수 없는 잘생김에 눈이 부시다는 자신의 취향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옆집 아저씨 가모카와의 대화가 실제 만담을 눈 앞에 보는 것처럼 우스우면서 솔직 대담하다. 어느 한쪽 편을 들기 곤란할 만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도 서려있다. (이 가모카의 모델이 실제 작가의 남편이라는 점은 역자 후기를 통해 밝혀진다) 그러나 다소 정형적이고 패턴화 된 선입견에 사로잡힌 시대착오적 남녀관은 언뜻 지적하게 된다. 가령 무조건 나이 어린 여성이 좋다고 밝히는 마초적인 모습은 눈살이 지푸려진다.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가 이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70년대라는 당시 시대상과 일본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본다면, 그럼에도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작가의 진취적이고 페미니즘적 여성관 또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더욱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차이, 특히, 성적 영역을 이렇게 맛깔스럽고 다채롭게 그려낸 걸 보면 탁월한 이야기꾼답다. 음담패설을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게, 쫄깃하면서도 바삭하게 구워낼 수 있는 솜씨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이상으로 남성 여성으로 나뉘는 인간에 대한 무한 애정과 끊임없는 관찰 속에서 빚어진 내공이 아녔을까. 두고두고 늘어놓아도 절대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끝없는 흥미의 원천임을 수긍한다. 


"남자의 성적 능력은 여자가 가진 성적 잠재 능력을 얼마만큼 끌어낼 수 있느냐에 있다."

섹스란 상대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함께한 상대를 배제하고서는 아무리 자랑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잠재 능력을 어떻게, 얼마만큼 끌어냈는지 일일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이즈와 횟수로 판가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란 참으로 단순하구나 싶은 것이다. 


그녀의 에세이를 읽으면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타고난 신체 구조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행성의 종족인가 싶을 정도로 몸의 감각과 가치관 등이 다르게 탑재된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내가 만약 여자가 된다면 몸의 어디를 자극하면 쾌감을 얻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다. 여자들 또한 늘 갖는 의문도 이와 같으리라. 남자가 섹스를 통해 간절히 얻고자 하는 쾌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그들의 욕망이 여자의 욕망과 일치하는 쾌감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그중에서 '남자의 욕망'과 '여자의 욕망'편은 같은 인간이면서도 이렇게 감각이 다를 수 있구나를 체감해 본다. 물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평소 느꼈던 생각이나 개인적 체험과 비교한다면 더욱 실감 나게 읽힐 것이다.     





남자의 욕망 


(작가는 어느 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소변을 참지 못하다가 끝내 집으로 들어와 볼일을 마친 뒤 옆집 아저씨 가모카와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다) 


"그 봇물이 터졌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겠군요"

"무척 시원하셨겠어요"

"말하자면 그때로군요."

"남자가 일을 끝낸 다음이요"


남자의 몸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남자의 성적인 부분이다. 더더욱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저 막연하게 유추할 뿐. 


"남자의 욕망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남자도 그러고 싶어 지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다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으악'하고 몰아치는 에너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발산하기만 하면 곧바로 마음이 후련해지고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이제 조금 이해가 가십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성욕 


남자의 성에 대해 살펴봤으니 여자의 성에 대해서도 다뤄야 공평하겠지. 

:

당연히 여자에게도 있다. 하지만 여자의 성욕은 평생에 걸쳐 만물과 닿아 있는 것으로, 남자처럼 좁고 깊게 응고돼 있는 것이 아니다. 평소 우리 여자들은 남성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이따금 불신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여성의 성욕을 남성의 그것과 같은 수준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곤자쿠 이야기>를 보면 기묘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떤 남자가 여행을 하던 중 별안간 음란한 마음이 일어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어느 밭 한가운데였다고 한다.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던 남자는 다급한 마음에 결국 밭에 있던 순무를 뽑아 가운데를 칼로 도려내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일을 끝낸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은 마음이 여자에게는 없다. 여자가 남자를 강간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건 꼭 체력과 신체적 구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

여자의 분출구는 한 가지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폭넓게 구석구석 이르러 있다. 따라서 여자의 욕구는 직접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게 하는 환경과 상황의 충족이 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여자도 때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때라고 해도 심리적 욕구 또한 충족되었으면 하는 의식이 아주 심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한 번 스쳐 지나가는 해프닝에 불과한 바람이라도 성욕만 충족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에게 결혼은 역시나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이다. 여자라는 여자, 즉 대부분의 여자는 남자가 "결혼해 주세요!"라고 프러포즈를 하면 마음이 놓여 속으로 외칠 것이다. (됐어!) 여자의 성욕은 이 말을 듣기 위해 있는 것이다. 단순히 남자와 성적으로 결합하기 위해서라는 꽉 막힌 이유 하나 때문만이 아니다. (중략) 이것은 단순히 '이제는 매일 남자랑 잘 수 있겠다'라는 즉물적이고 쩨쩨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남자의 성욕은 한순간 발산하면 그것으로 끝이 나지만 여자의 그것은 느리고 느긋하고 지긋하며 길고 천천히 피어난다. 다시 말해 남편을 두고 아이를 낳아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그 모든 행위가 성욕인 것이다. 


여자에게 성욕이란 침대 속뿐만 아니라 온갖 것에 넓게 퍼져 끝없이 이어져 있다. 설령 미망인이나 노처녀, 즉 남자와 함께 살지 않는 성인 여자가 성적 굶주림 때문에 고민한다고 해도 그것은 '처리'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닌, 더 큰 마음의 결핍을 해소해야 채워지는 것이다.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속에 큰 동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자를 이유 없이 욕구불만으로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여 불평하게 만든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걸 배제한 채 단순히 성욕 하나를 해결하려고 밭에 있는 순무를 뽑아 몸에 댄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건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자의 성욕은 머나먼 절에 있는 종과 같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지만 그윽하고 강한 소리를 내며, 여운이 어둡고 묵직하게 깔리면서 음파를 형성하고, 그 음파는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여자를 유혹하려고 하는 건 무거운 죄다. 여자의 욕구는 느리게 다가온다. 아까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아직도 뭐가 부족한 거냐, 남자들은 모두 여자의 욕심에 진력이 난다고 말하지만, 여자의 성적 만족은 단순히 톱니가 맞물리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유치한, 혹은 간단하고 천박한 것이 아니다. 남자를 거미줄로 공들여 휘감고 아이를 만들어 둥지를 꾸리는 그 긴 시간 동안의 충족을 말하는 거이다. 한두 번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남자의 성욕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알겠는가?


성욕. 남자에게 그것은 주사기에 들어 있는 약간의 에센스이고, 여자에게 그것은 양치액처럼 희석시켜 오래도록 쓰는 것이다. 또는 남자에게 그것이 한 방울의 향수라면, 여자에게 그것은 샤워하고 넉넉히 바르는 오드 콜로뉴 같은 것이다. 넓고도 깊게 어디에나 이르러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여자의 성욕이다. 따라서 겉치레를 좋아한다거나 거짓말이나 질투를 하는 것, 그 외에도 여자가 하는 여러 가지 악행 모두는 성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그것 참 시끄럽네. 남자는 저기 저 순무나 껴안고 가만히 계세요. 여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덧: 여자의 욕망이란 이렇게도 심오하고 오묘하니, 남자들에게 과연 그 만 분의 일이라도 이해해 달라 기대하기도 어려운 노릇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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