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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r 27. 2017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

#07_수없이 듣고 반복했던 말 한마디라면 어디서도 찾을 수 있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은 첫 문장부터 아버지 주세페 레비의 호통으로 시작된다. 동시에 표시된 인물 각주로 눈길이 간다. 그 당시 생물학 교수로 그의 수하 아래 배출된 노벨수상자의 이름도 표기되어 있다. 주세페 레비는 실제 인물이란 말인가? 다시금 눈을 씻고 앞의 작가 서문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픽션이 아닌 실화. 작가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머리가 얼얼해진다. 곧 정자세의 마음으로 다시 첫 페이지를 읽어나간다. "허구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썼다." 진실만을 글로 담아낼 수 있으며 기억에 의지한 기록은 어쩔 수 없는 여백과 혼돈을 남기며 그 또한 소설의 일부분이라고 담담히 고하고 있다. "문학만이 개인의 삶을 기억한다"라는 작가의 말은 생각 없이 나온 허튼소리는 아닌 듯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식인 계층의 생물학 교수이지만 어느 아버지 못지않게 고집불통의 꽉 막힌 사람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늘 불같이 화를 내고 "당나귀 같다", "니그로나 할 짓이다"라는 까닭 없는 거친 단어를 연발한다. 반대로 그녀의 어머니는 쾌활한 낙천가이다. 수다 떨기를 좋아하며 오페라나 연극 영화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지만 한번 이사하면 다시는 연락을 취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녔다. 유별난 부모 아래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빠 3명과 언니 1명을 두고 있지만 나이차가 많아 형제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신 유년시절의 보고 들은 가족의 모습을 제3의 관찰자가 되어 서랍 속에서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마치 주말 연속극에나 나올 법한 대가족처럼 그녀의 가족 역시 요절 복통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파시즘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개성 강한 가족인 만큼 그 안에서 사용되는 단어들도 일관적이고 특이하다. 이를 해설에서는 가족의 밀어(密語)라고 표현한다. 그 가족만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단어. 싫고 좋음의 의견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기분이 어떠한지도 알 수 있는 뉘앙스의 제스처, 분위기, 행동들. 타인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이른바 가족어 사전이다. 가령 각자의 애인의 집 혹은 친구의 집에 초대받을 때 타자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거리감 같은 것. 그 가족만이 사용하는 언어, 어감, 말... 나의 가까운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런 성격을 지녔는지, 그 가족을 만나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것들. 가족이라는 배경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뿌리 깊은 가족 구성원의 유전자로 대를 이어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한 가족의 밀어를 풀어낸 이 소설은 그 어느 가족 소설 못지않게 흥미롭고 비극적이며 동시에 친근하고 간혹 실소를 자아낸다.

 



p.36-37


우리 형제는 5남매다. 우리는 각기 다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어떤 형제는 외국에 산다. 그리고 편지 왕래도 자주 없다. 만났을 때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우린 베르가모에 소풍 온 게 아니오'라든지 '황화수소산 냄새는 어떤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떼려야 뗄 수 없도 없게 이런 문장, 이런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장 하나 혹은 이런 말 중의 하나는 우리 형제들이 어두운 동굴 속이나 수백만의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서로를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들의 라틴어였고 지나간 날들의 사전이었으며 이집트 혹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상형 문자, 존재하기를 멈추었지만 난폭한 물살과 시간의 부식 속에서 살아남은 생명 세포들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하게 될 우리 가족 간의 연대감의 토대를 이루면서, 우리 중 누군가가 "친애하는 리프만 씨"라고 말하게 될 때, 그리고 곧 "그 이야기 좀 집어치워!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하는 성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다시 울리게 될 때, 지구 상의 이곳저곳에서 이런 말들이 다시 창조되고 살아날 것이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반(反) 파시스트 운동가, 러시아 문학가 레오네 긴츠부르그의 아내이며 이탈리아 유태계로 그녀의 가족은 무솔리니 정권 아래 파시즘적 인종차별주의로 박해를 받아왔다. 토리노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일상적이면서도 유별난 가족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수식 없이 묘사하고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 아래 개인적인 체험을 녹아냈다. 특히 이 소설은 작가의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부모와 언니 오빠들과의 관계, 그들의 언어적 행동적 습관, 프루스트를 좋아하는 취향, 형제의 성장 과정을 영화 보듯 내밀하게 그려냈다. 그 반면 본인의 이야기는 가위로 종이 자르듯 공백으로 남겨두고 최대한 절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고 남편과 어떻게 만나 이별할 수밖에 없었는지, 2차 세계대전을 어디서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과정이었지만 이 부분은 그저 몇 줄 안 되는 문장으로 가볍게 스케치하듯 지나간다. 오히려 그녀 주변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상세히 그려내며 그 시절 작가가 느꼈을 불안과 슬픔을 유추해 나간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사람들의 귀향과 복구의 과정을 그려낸 부분이다. 거창한 서술이나 영웅적 관점으로 거론하기보다 시인의 시선으로 '모두들 자신은 무엇이든 시로 쓸 수 있고 써야 한다고 믿었다'라고 풀어낸 문장들은 몇 번을 읽어도 미려하여 불투명한 창가 저 너머를 바라보듯 아득해진다. 그렇게 정치적 언어와 시의 언어가 복잡하게 얽히고 각자의 목소리가 커져가며 시와 언어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끝내 불만으로 가득 차 홀로 자신의 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음을,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마음으로 절감하게 해준다.  






p.238- 240


치아의 한쪽 다리가 아파,

밤이면 가끔씩 고름이 흘러나왔다.

공제 조합이 치아를 베르첼리로 보냈다.


: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시인이라고, 정치가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침묵하는 듯하고 현실은 유리창 저 너머로 보듯이 무표정하고 투명하고 소리가 나지 않는 부동의 물체로 여겨졌던 긴 세월을 보내고 난 뒤, 모두들 자신은 무엇이든 시로 쓸 수 있고 써야 한다고 믿었다. 파시즘 시대에 소설가들과 시인들은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펜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계속 글을 쓰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던 빈약한 유산 속에서 온갖 주의를 기울여 언어를 선택해야 해다. 파시즘의 시기에 시인들은 무미건조하고 폐쇄적이며 꿈과 같이 불가사의한 세계만을 표현했다. 이제 다시 주변에는 수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현실은 다시 손에 닿을 것 같았다. 과거에 절필을 했던 사람들이 즐겁게 수확을 거두었다. 그리고 모두가 수확에 참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수확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가 혼란에 빠졌고 시와 정치는 함께 뒤섞였다. 하지만 그 후의 현실은 복잡하고 비밀스럽고, 꿈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판독할 수 없으며 불명료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전히 유리창 저 너머에 존재했고 그 유리창을 깨부술 수 있다는 환상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났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은 곧 의기소침해지고 실의에 빠진 채 몸을 숨겼다. 그리고 씁쓸하게 절필을 하고 깊은 침묵 속에 다시 빠져들었다.

:


한쪽 다리가 아픈 치아에 대한 시 같은 것들은 그 당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도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시가 아주 감동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건 그 당시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글쓰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유쾌하지 않은 장식 없는 풍경을 배경으로 음울하고 축축하고 가혹한 현실의 흔적들 위에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폭력과 흥분된 눈물과 격한 탄식과 흐느낌을 사건들과 뒤섞는 것이었다. 두 경우 모두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사용하지 않았다. (중략)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시와 언어로 세상을 다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 실수를 범했다. 그로 인해 시와 언어에 대한 반감이 뒤따랐는데 그 반감이 너무 커서 진정한 시와 언어들을 배제시킬 정도였다. 이로 인해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혐오감과 구토로 무감각해져 침묵하게 되었다. (중략) 모두들 이런저런 식으로 자신이 속았으며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현실에 뿌리내리고 살던 사람이든, 그 현실을 이야기할 수단을 갖고 있거나 갖고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든 다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람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홀로 자신의 길을 다시 갔다.




덧붙여 나탈리아와 그의 죽은 남편과의 오랜 친구 파베세의 관한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다. 그가 훨씬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구절만 보고도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가 끝내 자살을 선택했음을, 그 누구보다 문학적이며 감수성 강한 시니컬한 독설가. 사랑에 오래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온전히 자신을 내던지는 사랑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사람.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아픔이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내던지게 할 수밖에 없음을. 하지만 이를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소동으로 읽히지 않았다. 장 아메리의 <자유 죽음>처럼 죽음조차도 삶의 자유를 선택한 그의 의지로 보였다. 그리하여 작가의 서술 또한 단순히 슬퍼하기보다 개인의 자유 의지로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를 가까이서 긍정하고 존중하는 애도로 읽혔다.






p. 282- 283


파베세는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충동이나 경솔, 어리석음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반면 파베세의 실수는 신중함과 빈틈없는 생각, 계산, 지성에서 탄생했으니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위험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빈틈없이 생각했기에 잘못 접어든 길에서 되돌아 나오기가 힘들었다. 치밀하게 저지른 실수는 우리를 단단히 얽어매었다. 치밀함은 경솔함이나 무모함보다도 더 단단하게 우리들 속에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강하고 그렇게 단단하고 그렇게 깊게 우리를 얽어맨 그 매듭에서 어떻게 풀려날 수 있을까? 신중함이나 계산, 치밀함은 이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성의 얼굴, 이성의 씁쓸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파베세는 우리가 모두 토리노를 비운 여름에 자살했다. 그는 산책 코스나 저녁 모임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처럼 자기 죽음과 관련된 상황을 준비하고 계산했다. (중략) 예기치 않은 일은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는 몇 년 동안 자살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버찌를 먹으며 나와 레오네를 만나러 왔을 때,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이미 자살에 관해 이야기했다. 프랑스 때문도, 독일군 때문도, 이탈리아를 뒤덮은 전쟁 때문도 아니어다. 전쟁을 두려워하긴 했지만 전쟁 때문에 자살할 정도는 아니었다. (중략) 그는 우리들 그 누구보다도 전쟁을 두려워했다. 그에게 두려움이란 예기치 못한 알 수 없는 회오리바람으로, 그의 명석한 사고에는 무시무시하게 비쳐졌다. 인생이라는 버려진 강둑에 밀려오는 어둡게 소용돌이치는 유독한 강물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 자살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삶 이외에도 우리의 미래를 보았고 그의 책들과 그에 관한 추억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보았다. 삶을 사랑해서 거기서 떨어질 수 없는 사람처럼, 죽음을 생각하긴 하지만 죽음이 아니라 삶을 상상하는 사람처럼 죽음 그 이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 그 이후를 응시했다. 죽은 뒤에라도 돌연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놀라지 않기 위해서였다.






1963년 <가족어 사전>은 이탈리아 최고 권위 문학상인 스트레가상을 받으며 그녀의 명성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기억에 의존하여 잊힌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허황된 과장 없이 본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낸 이 소설은 어느 모로 우리 이웃의 모습일 수도 있고 나의 가족의 모습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가족이지만 그것이 파란만장한 시대상을 통과해나가며 유일무이한 추억으로 어떤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이야기로 남겨진다.  


소설 마지막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밑도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대화로 마무리 된다. 나이를 먹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왔지만 아버지의 언어와 어머니의 단어는 변함없이 똑같이 반복된다. 소설 너머의 이 가족의 뒷 이야기가 내심 궁금하지만, 부모의 마지막 대화만 봐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을까' 싶은 지긋지긋함,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절로 쓴웃음이 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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