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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ul 28. 2017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08_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말고, 그냥 여자, 여자 사람을 찾습니다. 


매주 씨네 21을 구독하던 시절, 영화 리뷰, 비평, 인터뷰만큼이나 즐겨 읽던 코너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였다. 사회, 인문, 문학, 만화, 추리 등등 장르를 넘나들며 매주 한 권의 서평을 꾸준히 남기는 이다혜 기자의 방대한 독서량은 경이로웠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이다혜 기자의 이미지는 회사 사무실에서 홀로 책상 한 가득 책을 높게 쌓아 견고한 성을 만들고, 그 안에 틀어 박혀 종일 책만 읽는 독서가의 단상이었다. 책을 경계로 자신만의 테두리 안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책만 읽고도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면 부러울 것이 없겠다는 망상도 서슴없었다. 


작가이면서 그 누구 못지않은 열혈 독자이기도 한 이다혜 기자의 두 번째 책의 부제는 '페미니즘적 책 읽기'이다. 읽기도 전에 복잡한 심경이 오고 간다. 페미니즘이라는 화두에 맞춰서 혹은 그 대세에 편입하기 위한 책이라면 분명 감정적인 낭패감이 후폭풍처럼 뒤 따를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찬찬히 표지 그림에 오래 더 시선을 두고 살펴봤다. 펼쳐진 거대한 페이지 앞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중력의 광대한 우주가 깔려 있다. 그 앞에 유유히 앉아 구경하듯 바라보는 주체는 남자도 아닌, 남자와 함께도 아닌 '여자 혼자'라는 것. 책을 펼쳐 느긋하게 뒷짐 지고 드넓은 우주를 관망하고 있는 한컷은 매혹적이면서도 고요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여자니까,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아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전문성을 필두로 거창한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책은 아니었다. 새로운 정보 혹은 이론을 소개하는 지식 전달 차원의 책도 아니다. 이미 타 페미니즘 도서를 통해 익히 습득해왔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숙지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가령, 위대한 작품으로 추앙받고 사랑받아온 문학의 대개는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그려낸 세계이며, 그 안의 여성이 갖는 위치란 비문명적이며 야만적임을, 이는 무수한 문화 코드에도 내재되어 있으며, 심지어 여성이 그린 여성 또한 명예 남성적 위치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정 이입해 왔다는 끔찍한 사실도 알려져 있다.  


새롭거나 특별할 것 없는 내용임에도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이라면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회고하고 있는 작가의 진솔함이다. 대한민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술회하고 반성하며 해답보다는 솔직한 물음을 던진다. 동시에 여성으로서 사회적인 환경 탓에 개인적인 무지로 인하여,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부조리한 경험을 다양한 책과 영화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준다. 모두에게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세상살이에 젖어 있다면 앞으로는 휘둘리지 않기 위하여 나름의 저항적 책 읽기를 모색하고 있다고 밝힌다. 


어린 시절 유달리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비록 성별은 여자이지만 남자 못지않게 당당히 제 능력 펼치며 성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입받았다. 그 덕에 하고 싶은 일에 여자라서 제약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의 여성성은 늘 부정적이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 1호였다. 그렇게 내 안의 여성을 죽이면서까지 남성화를 갈망하며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며 사회적 편견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며 정당화했던 것 같다. 


그동안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체득된 서글픈 감정과 불편한 기분은 무엇이었는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읽었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싸워온 고독함. 눈에는 힘을 주고 손에서는 칼을 놓지 못한 채 온갖 비난 앞에서도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투쟁의 시간들. 그저 운이 좋아 (여자임에도) 지금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회고는 쓴 가루약을 털어 넣듯 씁쓸해진다. 





p.18 


나의 인생은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회고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끝나버린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하는 것으로 삶의 찰나를 만끽하고 그것을 반성하는,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 회고할 일만 남은 중년 남성으로서의 나 자신을 연민하는 정서에 중독되어 있었다. (중략) 백인 남성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상에 하지 못할 모험이 없고, 원하지 못할 대상이 없으며, 이루지 못할 꿈이 없다. 일단 다 해버린 다음에 근사한 말로 경험을 치장하고 나 자신을 혐오하며 반성하면 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고 원망하기보다 사고 치고 후회하는 게 나은 세계,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세계를 백인 남자들이 써낸 무수한 소설들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큰 그림을 그리는 세계를, 대의,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되어주는 거대한 숙명.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운명은 대체로 그들의 소설에서...... 음, 아니, 잠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말고는 왜 작품 속에 없는 건데? 그냥 여자 어디 없어요? 

 여자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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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로 소개된 소설 대부분이 친숙하다. <제인 에어> <위대한 개츠비>  <나를 찾아줘> <말괄량이 길들이기> <무진기행> <종이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차별점이라면 기존의 남성적 시선을 해체하고 여성적 입장과 눈을 통해 해석해 준다. 그 시절 차마 입 밖으로 내비칠 수 없었던 불편함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상세하고 자세하게 되짚어 준다. 어째서 여자이면서도 소설 속 우월에 가까운 남자 주인공 정서에 낭만적으로 이입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까. 늘 기다리고, 늘 인내하며, 늘 지고지순함에 가까운 정서를 강요당한 여성적 이데올로기는 소설을 읽는 여성 독자들도 피할 수 없는 프레임이었다.  



p.224 


여성 독자들은 잘 이해한다. 많은 것들을 이해한다. 남성의 눈을 맞추어 괜찮은 여자가 되고자 노력하고, 남성이 욕망을 느끼는 패턴을 이해한다. 그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스쳐도 그냥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때리며 '널 때리는 나'에 눈물을 흘리면, 맞는 여자보다 때리는 남자의 '심적' 고통에 공감할 줄도 알게 된다. (중략)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늘 피해자가 생각하는 것이다. 왜 가해자가 가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왜'라니. 마치 이유가 있으면 그래도 된다는 듯이.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남성 중심의 스토리텔링에 잘 길든 결과가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모든 소설과 영화에서 남성이 여성을 때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남자의 심리 쪽이다. 여자는 이해할 수 없으며 감정적이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 이야기가 많다. 여자는 늘 갑자기 화를 내고 갑자기 사라지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여성들의 많은 행동에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남성 중심의 서사는, 사실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나는 정말 잘 이해한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남성의 기록이었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은 남성의 역사였다. 이것을 이해하는 법을 진득에 배우지 못했다면 벌써 사회에서 생존이 어려웠겠지. 하지만 그 결과, 여자다운 것이 남자에게 받아들여지는 틀 안에 있지 않다면 배척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모아나>와 <겨울왕국>을 보고 자라는 세대를 보며, 부디 그들이 만날 세상이 달랐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들이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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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외에도 영화에 관한 작가의 소고들도 찬찬이 엿볼 수 있다.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지금이라도 여성 캐릭터의 역할에 대해서, 여성 인물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 대사 등을 날카롭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여성이 더 이상 남성을 위한 도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더 이상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포장하고 관계를 규정지으며 여성을 압박하는 행동은 거부해야 한다. 여자라서 사랑에 목을 맬 이유도 없고, 여자라서 결혼과 출산을 당연하게 요구할 권리도 없으며 여자니까, 남자니까 라는 흑백 논리를 앞세우는 것 또한 고루하다. 






가감 없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고백하고, 인정하기 쉽지 않은 실수와 과거사를 털어놓는 글 속에서 저자의 수많은 고민과 의구심, 고심에 고심을 더한 흔적들이 묻어난다. 그때는 모두가 그랬으니까,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무지와 합리화 또한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한 여성을 향한 폭력이었다. 심지어 여자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 또한 남성의 그것 못지않게 협소하여 슬프기까지 하다. 


p. 163 


인생은 짧고 굵은 게 멋지다고 생각했던 스무 살의 나에게 마흔 살의 나는, 타인의 시선에 멋진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스무 살의 나는 아마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구질구질한 건 싫다고, 그럴 거면 때려치우라고 마흔 살의 나에게 충고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저 쓰게 웃으며, 여기 사람 있어요, 하고 누구에게랄 것 없이 구조 요청을 하리라. 시야 밖으로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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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적은 여자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여자야말로 여자를 적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드라마 대사가 생각난다. 여자의 적은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다. 심지어 여자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갖은 질투에 눈이 멀어 헐뜯고 연대하지 못하는 성별로 그려지기 일쑤다. 우정도 없고 의리도 없다고 말이다. 



p.54


여성의 적은 여자라고들 한다. 살아보니, 여자의 적은 여자인 경우도 있고 남자인 경우도 있다. 당연하다. 지구인 절반은 여자 아니면 남자다. 여자의 적이 여자라는 말이 통용된다는 것은, 그 직군에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거나, 그 수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여자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환경인 경우 정도일 것이다. (중략)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일하는 환경이라면, 여성의 적은 여성이거나 남성이 되겠고, 반대로 남성의 적 역시 남성이거나 여성일 수밖에 없다. 


 




p.92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불편한 딱지나 낙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다는, 비록 그것이 나의 존엄을 해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나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저는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비난에 저항하고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비난을 무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수많은 나날에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떤 순간에라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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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성인이 되면 혼자서 여행하기, 책을 읽는 취미를 갖기, 스스로 돈을 벌어보라고 졸업반 여고생들에게 조언한다. 에세이에 더 가깝지만 그 안에서 일과 사랑 결혼에 대한 여성의 입장에서 읽고 해석한 결들도 풍요롭게 담겨 있다. 소녀들에게 야망을 갖기를 권하며 기부를 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말고 그냥 여자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에 기꺼이 동참하라고 말한다. 



p. 199 


여성의 선택이라는 게 유독 존중될 때도 있다. 성추행, 성폭행을 포함한 범죄에 노출될 때다. 그런 옷을 입었으니까, 그런 시간에 그런 곳에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과 사귀었으니까. 너의 선택이고 네 잘못이라는 말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는다. 다른 많은 범죄와 달리 성범죄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비난받기 일쑤다. 언젠가 동료 A가 우연히 알게 된 남자들과 술자리를 했다가 문제가 생겼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고 나는 말했다. A는 물었다. 왜 여자에게 조심하라고 하죠? 모르는 사람들과 맥주 한잔하면서 어울리는 게 범죄도 아니고. 그렇게 남자들끼리는 잘 어울리는데, 여자가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A의 말은 옳았다. 내 실수였다. 가해자 대신 피해자에게 조심하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중략) 왜 여성과 남성이 함께 결혼을 하고 아이를 선택했는데, 여자가 자꾸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선택을 지켜갈 수 있는가. 이것은 당연한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유달리 '울게 된다'라는 표현이 마음을 건드린다. 소리 내어 울 수 없어 입을 꼭 다물고 눈물을 참아내야 했을 그 어떤 감정에 동요된다. 손을 내밀어 함께 울어주고 싶거나 혼자 실컷 울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선배 여성이 후배 여성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제 갓 학교를 졸업했거나 사회생활을 앞두고 있는 여성이라면,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상관없이, 연령과도 무관하다. 나이를 먼저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혼란의 정체를 몸소 겪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그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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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97 


선택이 자유롭고 능동적이려면 일단 선택지를 가능한 한 넓혀놔야 한다. 빈곤의 문제가 세대를 불문하고 심각해지는 시대에, 선택하라는 말은 얼마나 그럴듯한 허구의 이데올로기인가.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선택지를 가능한 한 조금씩 더 넓혀 갈 수 있기를, 그리고 원하는 것을 세상에 요구했을 때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랄 뿐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가 허용되도록 기성세대인 나부터도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다. 


p. 146


"당신 자신을 당신의 딸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스스로에게 사주고 싶은 것...... 어떻게 달라지나요? 스스로에게 자책하며 던지는 말을, 딸에게 라면하고 싶으세요? 지금 스스로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딸에게 라면 아끼고 싶으신가요? 나는 내 딸이다, 내가 사랑하는 내 딸이다 생각하고, 마음이든 물건이든 어떻게 해주고 싶은지 생각해보세요." 


나 자신이 딸이었던 기억,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기억을 잃어가며 나이를 먹는다. 세 살 난 딸에게는 배꼽 뽀뽀도 해주고 매일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해주던 부모들은 이제 늙거나 죽었고, 나 역시 그런 애정 표현은 해준대도 싫다. 그런데 그냥, 사랑하는 내 딸이다라는 확신에 찬 감정만으로도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감정이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훨씬 쉽다. 신기하게도 그렇더라.) 아주 약간은 고통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우리 엄마도 나를 이런 감정으로 생각했을까를 생각하면 조금 울게 된다. 







이미지 출처 @헨(Henn), Reading is Dreaming with Your Eyes 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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