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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Oct 02. 2017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09_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와 절망을 향해 가는 선택의 딜레마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은 과거의 두 가지 선택 앞에서 망설였거나, 다른 길을 선택 혹은 환경에 따라 한쪽 길을 지나쳐야 했던 다양한 상황들을 소설로 형상화하고 있다. 11편의 소설 주인공들은 선택의 결과를 곱씹으면서 그 책임의 대가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선택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은 있지만 오히려 분노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태도를 취한다. 선택으로 인한 잠깐의 괴로움은 있을 수 있지만 절망하거나 자기를 부정하며 자책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지’ 라며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자조적 웃음을 지으며 돌아설 뿐이다.




 <트래비스 B>의 주인공 쳇은 멀리 사는 변호사 트래비스를 만나기 위하여 힘들게 찾아가지만 냉담한 분위기에 돌아서고 만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을 타당한 이유를 스스로 애써 찾거나 필요 없어진 여자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나서야 종이를 버리는 행동으로 좌절된 풋사랑을 보여준다.


p.33


그는 밖의 어둠 속으로 걸어나가 울타리 밖으로 펼쳐진 들판을 보았다. 달이 떠 있는 검푸른 대지에는 소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고관절이 쑤시고 뻣뻣했다. 오줌이 마려워 헛간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 김이 피어오르는 눈 속의 작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는 베스 트래비스에게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 보여주기 위해 씨라도 뿌렸어야 했는지 생각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녀가 다시 그 거리를 운전해 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안다. 그녀는 변호사이다. 원한다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찾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를 아프게 했다. (...)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전화번호가 외워질 때까지 달빛 아래 한참을 들여다봤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종이를 둥글게 구겨서 멀리 던져버렸다.


<초록에 빨강>은 성추행을 당한 샘이 자신을 그런 상황에 방치한 아버지에게 그날 왜 그랬냐고 묻고 싶으나, 싱크대로 접시를 가져가 듯, 이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 버린다.


p.47


그의 눈은 감겨 있었고, 마치 자신의 손이 어디 있는지 잊은 것처럼 보였다. 잠시 뒤에 손이 그녀의 살갗을 쓰다듬으며 허벅지 뒤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손목을 잡아 밀어냈다. 손은 잠시 허공에 그대로 있다가 다시 반바지에 감싸인 그녀의 허벅지 뒤쪽으로 미끄러져 오더니 두 다리 사이를 만졌고, 총이 발사될 때 손에 전해지던 충격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p.50


갑자기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밀려들며 기숙학교로 떠나는 것이 실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그녀를 거기 혼자 두고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던 것이다. 분명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그녀는 확실히 하기 위해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갔고, 그 순간은 사라져 버렸다.


<사랑스러운 리타>의 스티븐은 또 어떠한가.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던 리타를 먼저 알아본 것은 스티븐이었지만, 친구 에이시가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에이시의 죽음 이후, 스티븐은 만약 자신이 먼저 리타에게 다가갔다면 어땠을까, 머리 속으로 가정을 해보지만 스티븐이 택한 것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을에서 찾은 익명의 자유이다.


p.56


어머니가 아버지와 같은 암으로 죽자 의사 중 한 명은 전이 속도가 빨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말했지만, 죽음이라는 것에 다행이라는 건 결코 없었다.


p.78


감지 않은 그녀의 머리에서 냄새가 났지만 어른의 냄새와는 달랐다. 열 살 때 갔던 공공수영장의 여름처럼, 그녀에게서는 샤워하지 않은 아이의 냄새가 났다.


p.82


초록색 꼬리가 없어도 그녀는 영락없는 인어였고 당시에는 그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에이시가 리타에게 느꼈던 감정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었고, 그건 너무 어려운 비교 상대였다. 몇 달 후 그는 그녀와 헤어졌고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그는 과거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중략)  이곳에 아무런 애착이 없다는 것에 조금은 슬퍼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는 자유였다. 이곳은 그가 노는 물이 아니었고, 그들은 그의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파이대스파이>는 서로 다른 성격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애런과 조지의 신경전과 다툼이 결국 스키장 슬로프 위에서 유치한 몸싸움으로 번진다.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애런은 앞으로도 이렇게 싸울 것을 알면서도 매년 스키장에 오자고 말한다.


p. 107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조지를 죽이지 못할터였다. 산소와 함께 좋은 기분이 물결치며 밀려들자 애런은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 꼬리가 묶여 있는 두 마리 개처럼 엮여 있었다. 상대에게 정반대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고, 필연적으로 서로를 잡아당기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편안히 살 수 없었다. 조지는 양로원에서도 애런을 약 올리면서, 애런의 꿈을 살면서, 클레어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중략) 건너편 소파에서 조지는 조나의 무릎을 베고 커피잔을 가슴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내년에도 꼭 오자." 그가 말했다. "매년 꼭 오자고."


<투스텝>은 남편의 외도가 의심되는 앨리스가 제일 친한 친구 네이오미에게 남편의 불륜이 의심된다고 하소연하지만, 정작 네이오미가 의심의 대상자라는 사실은 모른다. 운동을 끝낸 남편이 돌아오자 가벼운 말다툼을 하던 앨리스는 남편과 탱고를 춘다. 이 모습을 보며 나온 네이오미는 그 남자의 차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눈을 붙인다.


p.123


그녀는 위로가 필요했다. 그녀의 남편은 앨리스처럼 너그럽지 않기 때문이었다. 맥스는 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타협이나 도덕적 모호함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와 결혼했을 때는 이런 특성이 열정적이고 결단력 있어 보였지만, 지금은 가혹하게 느껴졌다.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그는 완전한 믿음에서 완전한 경멸로 옮겨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믿었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았고, 앞으로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의 차, 그의 자기 비하에 어울리는 낡아빠진 오래된 스테이션왜건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는 집까지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왜? 앞유리는 여전히 눈이 닦인 채였다. 곧 그가 찾아와 중요한 건 그녀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분명해 보였다. 밤새 앨리스와 탱고를 추진 않을 것이다. (...) 그녀는 너무 피곤했다. 잠잘 시간이 거의 없었던 데다 지금은 심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잠겨 있지 않은 조수석 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안은 여전히 따뜻했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좌석을 뒤로 젖혔다, 자면서 그를 기다리기 위해.


<여자친구>는 제목과는 사뭇 다른 긴장과 서스펜스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자신의 딸을 강간 살해한 남자 트로이 대신에 그 남자의 여자 친구 사샤를 호텔방으로 불러내어 사건에 대해 물어본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질문하는 남자와 미성숙한 소녀 사이에는 차가운 분노와 내재된 슬픔이 교차하며 지나간다. 그가 알고자 했던 진실은 밝혀지지만, 그는 그로 인하여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영원히.


p.142


그가 알아낸 사실을 헬렌에게 말하는 상상을 해봤지만 그의 마음은 공포로 텅 비어버렸다. 몸에서, 축축한 겨드랑이에서 분노와 비참함의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고, 수여장에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몸에서 염소 냄새가 나고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그는 만약 자식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144


질서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사실을 알고 정리하는데서 위안을 얻었다. 그는 이야기를 원했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이야기였다. 고통은 여전히 그의 몸속에, 그의 뼛속에 둥지를 틀고 자리 잡고 있었다. (...)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보낼 몇십 년의 세월이 그의 앞에 남아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부자 할머니 <릴리애너>가 갑자기 살아서 손자 '나'의 집을 방문한다. 평범한 자기 집에서 릴리애너가 손녀 손자와 다정하게 피자를 먹는 모습에 감동하지만, 그녀가 돌아간 뒤 남은 것은 알 수 없는 패배감이다. 할머니가 두 번 죽어도 내가 유산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는 자각 때문이다.  


p.165


할머니는 나를 두 번째로 무시하려고 우리 집 현관에 나타난 것뿐이다. 이번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면밀히 조사를 하고는 내 안에 당신을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고. 미나처럼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내만큼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가슴속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멀어져 가는 강아지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역시 분노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중성화 수술을 받지 않은 고양이의 운명처럼 우리는 릴리애너 할머니에게 뚜렷한 존재감을 심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연장전에서조차 실패했고, 할머니는 떠났다.


<아구스틴>은 홀로 사는 노신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두 딸이 무서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며, 하녀가 되어 돌아온 아구스틴에게 다시 한번 청혼을 하지만 유부녀이자 아들까지 둔 그녀는 거절한다.


p. 209


만약 루차가 점심때 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대 총을 쏘지 않았을 것이고, 차 바닥을 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네스 마르틴이 어머니의 집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고, 멍청하고 허영심 많은 프랑스 여자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네스 앞에 납작 엎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멍도 들지 않고, 책과 말과 저택과 함께 조용하고 무사안일한 삶을 살아갈 것이었다. 지금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나무들이 그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제멋대로 거대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겠지만, 나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파블리노가 당황할 것이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손을 꽉 맞잡았고 이 끔찍한 세상을 알려준 딸을 저주하며 모욕감과 열망으로 가득 차 그의 문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에서는 명백하게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남자의 욕망이 잘 드러난다. 아들 또래의 여자에게 욕정을 느끼는 필딩은 아내와 자식들을 기만하면서까지 가족도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이다.


p.231


그는 양면성과 욕망으로 저주받았다. 조금 더 용감한 남자였다면, 아니 조금만 더 겁쟁이였다면 간단하게 떠났을 것이다. 더 행복한 남자였다면, 또는 현실에 좀 더 안주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머무르며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흥청거렸을 것이다. 마치 낡은 목욕가운처럼 그 익숙함으로 몸을 감싼 채로. 그는 이도 저도 아닌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실망시키고 걱정시키게 될 뿐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메그가 시를 써서 집에 가져온 적이 있었고,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가지 모두가 내가 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자신의 강력한 힘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떤 바보가 오직 한 가지 길만을 원하겠는가?


이밖에도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살게 된 남자의 아들에게 사랑을 느끼는 딸 제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오 타넨바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함께 이동 중인 에버렛이 눈 길에서 처음 만난 커플의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상황을 그렸다.





이 11편의 단편집 주인공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이와 연령을 초월하여, 어린이도 어른도, 노인도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아쉬워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지만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아니다. 그들은 운명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는 견디는 힘을 보여준다. 그 안의 욕망은 뜨겁게 들끊지만 시종 고요하고 차갑다. 다양한 사건과 갈등이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처럼 기괴하거나 심하게 뒤틀린 냉소보다는 부조리한 상황 안에서도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대사에서 작은 위안과 위로를 발견한다.


“후회 없는 선택이란 없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후회하며, 절망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선택에 대한 딜레마를 겪는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내가 그때 그 선택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의미의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는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하여 고민하지만 어느 선택을 하더라도 100% 만족은 불가능하다.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주저앉지만 그렇다고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어떤 선택에도 완벽한 불행도, 완벽한 행복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선택을 취하더라도 삶은 당신의 턱에 주먹을 날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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