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때는 그럴만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나와 도현은 늦은 오후, 동서울터미널 역에서 만나 전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시작되는 주말이었다. 영화제에 가고 싶다고 한 사람은 나였다. 도현이 아는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뿐이었지만, 내가 가자고 하면 군말이 없었다. 전주 버스터미널 역에서 내린 우리는 숙소에 가기 위하여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뒷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날이 점점 어둑해지더니 유리창 위로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졌다. 우리는 한쪽씩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었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고 우리 둘만 남았다.
청바지.
도현이 갑자기 말했다.
뭐라고?
도현이 딸꾹질하듯 말했다.
청바지 샀어.
청바지를 왜?
너 주려고.
나는 말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득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로 시작되는 노래가 떠올랐다. 그다음 가사가, 밥을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걸 보면 많이 듣긴 했나 보다.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노래 제목이 뭔지 알아? 내가 흥얼거리자 도현도 갸웃했다. 제목이 생각이 날 듯 나지 않았다. 도현이 변진섭이라고 검색하자 연관검색어로 청바지가 따라붙었다. 변진섭 청바지를 클릭하자 도현이 나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희망사항. 뜻밖의 제목이라 놀랐다. 이상형이 희망사항이라는 건가. 나는 피식 웃고는 부슬비를 바라봤다. 그다음 가사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그것만이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다. 나는 끝내 묻지 않았다. 왜 청바지를 샀는지를. 도현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영원히 모를 터였다.
나는 그날의 희망사항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기대했던 것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한다. 그때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뭐가 문제였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다만 기억나는 건, 버스를 타는 내내 고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둘 다 아무 말 없이 음악만 들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순간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현을 흘끔 바라보니 침착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그게 못내 얄미웠다. 나는 이토록 울적한데 쟤는 뭐가 저렇게 차분할까. 청바지라니, 청바지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내가 언제 사달라고 한 적 있어? 뜬금없게 청바지라니. 나는 이상하게 시큰둥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까지 걷는 내내 그랬다. 다행히 큰 비는 아니어서 우리는 조금만 비를 맞았다. 숙소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였는데 2인실이었고 우리가 들어가자 따뜻한 조명이 한 곳을 비춰 아늑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도현이 가방에서 청바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걸 받아 의자 위에 올려뒀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을 반복해서 떠올려본다. 느리게 움직이는 나와 도현을. 청바지를 입어 보라는 말도 없고, 입을 생각도 없는 나에 대해서.
나는 피곤해서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웠다. 도현이 다가와 내 옆에 누웠지만 누구 한 명 말이 없었다. 나는 도현이 뭘 하나 궁금해져 흘끔 쳐다봤다. 그는 이어폰을 끼고 아이패드를 보며 뭐가 재밌는지 킥킥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감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도현이 자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의자에 놓인 청바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빳빳한 새 청바지. 나는 일어나 청바지를 들어 올렸다. 게스라고 적힌, 일자형 디자인. 나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바지를 잘 입지 않는다. 통통한 허벅지를 가려줄 치마를 더 자주 입었다. 나는 가방 안에 청바지를 도로 쑤셔 넣었다.
10시가 다 되어도 도현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지금 나가야 예매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어젯밤부터 그가 한 일이라고는 혼자 아이패드를 본 것뿐. 나는 깨울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 이대로 혼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차피 내가 좋아서 예매한 영화니까. 영화도 숙소도, 모두 다 내가 계획한 것이니까. 도현은 항상 그랬다. 싫다 좋다도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 그러니 내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겼다. 그 순간 도현이 깨서 부스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해? 어디가? 나는 대꾸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때는 도현도 대충 알 거라 생각했다. 나의 이 참담한 기분을.
도현이 쫓아와 내 팔을 낚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도현은 불같이 화를 냈다. 놀란 나는 그를 무시했다. 도현이 다시 내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사준 청바지 내놔! 내가 청바지를 꺼내자 도현은 거칠게 낚아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이게 무슨 상황인가를 생각했다. 도현이 움켜쥔 건 내 손이 아니라 청바지였다. 내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