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앤드라이

08. 라디오헤드의 ‘High & Dry’였다.

by 신화진


미유와 세균은 어플을 통해 만났다. 취미를 통해 사람을 연결해 주는 어플이었다. 뉴페이스도 만나고 취미도 만들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미유는 악몽 같던 연애를 끝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어플에 접속했다. 수많은 프로필 사이에서 일대일로 기타를 가르쳐주겠다는 소개글이 눈에 띄었다. 성인취미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있으며 원하는 곡 하나 정도는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더욱이 재능기부 차원에서 찻값만 받겠다고. 미유는 집에 처박아 둔 클래식 기타를 떠올리며 쪽지를 보냈다. 며칠 뒤 미유는 세균과 홍대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미유의 클래식 기타를 본 세균은 당황해했다. 팝을 연주하려면 어쿠스틱 기타여야 한다고 했다. 미유는 클래식 기타로도 팝을 연주할 수 없냐고 하자, 세균은 머뭇거리며 안 될 건 없다고 했다. 그럼 이 기타로 연습할게요. 미유가 해맑게 말하자 세균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세균은 해외 의류 브랜드 영업팀 대리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기타를 쳤고 뮤지션이 꿈이었다. 대학만 들어가면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다고 믿은 세균은 알만한 대학에 진학하자 바로 교내 밴드 동아리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아 기타를 맡은 세균은 커버곡만 연주하는 밴드 활동에 염증이 났다. 자작곡을 만들어 프로 데뷔를 하자고 멤버들을 꼬드겼으나 돌아온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밴드는 취미였던 부원들은 취업 시즌에 맞춰 하나둘 빠져나갔고, 세균도 어쩔 수 없이 구직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운 좋게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 안정을 되찾자마자 사회인 취미 밴들에 들어갔다. 자작곡에 대한 욕심은 버리고 커버곡으로 공연도 열고 지인을 초대하는 것에 만족했다. 세균은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 음악이라 자부했다. 기타가 없다면 자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낯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열변을 토하는 세균은 어딘가 붕 떠있었으나 미유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전 남친한테서는 볼 수 없던 박력과 열정이었다. 다음에는 이 노래를 연습하자며 세균이 한쪽 이어폰을 미유에게 건넸다. 라디오헤드의 ‘High & Dry’였다. 세균은 가수는 물론 음반 발매 시기와 음악사적 족적에 대한 설명도 주석처럼 달았다. 브리티시락의 팬이라 자처한 세균은 이 곡이 코드도 심플하고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두 달 뒤, 세균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미유를 초대했다. 세균은 이날 요리 솜씨를 마음껏 뽐냈다. 요섹남이 대세라고 했던가. 요리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섹시하구나, 미유는 생각했다. 세균은 작은 조리대 앞에서 홀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마치 문워크를 추듯 능수능란했다. 새우를 비롯한 값비싼 해산물을 잔뜩 넣은 오일파스타를 만드는 동시에 다른 팬으로 아스파라거스를 구웠다. 세균의 이마에 촉촉하게 땀이 맺혔다. 그는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꺼내고 잘 익은 아보카도를 능숙하게 반으로 잘라 촘촘하게 썰었다. 그린 샐러드 위에 손질된 토마토와 아보카도를 올리고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리더니 곧장 찬장에서 유리 와인잔 두 개를 꺼냈다. 반지하 거실 바닥에, 네모난 이케아 탁상이 펼쳐지고 라넌큘러스 화병이 올라왔다. 세균은 미유의 와인 잔에 능숙하게 붉은 와인을 채웠다. 원테이블 프렌치 레스토랑을 떠올리며 미유는 웃었다. 파스타 면발은 탱글탱글, 샐러드볼의 양상추는 아삭아삭했다. 미유는 손뼉을 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세균은 유투브 한 번 보고 따라한 거라며 별거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고른 와인의 품종과 생산지에 관해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났다. 세균은 와인소믈리에 자격을 따기 위해 수강 중이었다.


술을 잘 못하는 미유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조금씩 식도로 흘려보냈다. 이 순간, 요리도 잘하고 와인을 비롯하여 모르는 게 없는 세균이 남자친구라는 것에 미유는 뿌듯했다. 이제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미유를 위하여 무언가를 만들거나 해 준 남자는 없었다. 힘들었던 지난 연애의 보상을 이번 연애에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갓 구운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세균은 분위기에 걸맞은 음악 또한 빼먹지 않았다. 해외에서 직구 한 빈티지 오디오 스피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스피커에 따라 소리의 결과 수분감이 달라진다더니 시간의 무게도 바뀌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더욱 촉촉해지고 부드러워졌으며 시간은 곡선으로 완만하게 흘러갔다. 트랙이 넘어가자 확연히 다른 음색을 띈 멜로디가 반지하의 꿉꿉함마저 산뜻하게 바꿔나갔다. 라디오헤드의 ‘High & Dry’가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미유는 이내 미소 지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멈추자 세균이 슬그머니 미유에게 다가왔다. 세균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인중에서 꼬릿한 냄새가 났다. 미유는 흠칫했으나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 점막이 느껴짐과 동시에 세균의 손이 미유의 웃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유는 세균의 손을 잡아 옷 밖으로 끌어냈다.


우리 사귄 지 2주밖에 안 됐어요.


아 그래? 그거밖에 안 됐어?


세균은 몸을 떼더니 민망한 듯 리모컨을 찾아 얼른 새로운 노래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