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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ug 23. 2017

영화 <더 테이블>

#사적인 영화_01:  일상의 언어로 변주되어 섬세하게 조율된 소품집 


*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작년 <최악의 하루> 개봉과 함께 궁금해 마지않았던 영화가 바로 <더 테이블>이었다. 여성 배우 4명의 연기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바도 컸다. 비록 어떤 영화가 나올지는 배우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실상 국내 여성 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당장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뿐이다. 하지만 출연 배우 리스트를 봐도 같은 결의 영화라고 선뜻 연결 지어 상상되지 않는다. <더 테이블>은 정유미_정은채_한예리_임수정 (에피소드 순서)이라는 자신만의 연기 세계와 경력을 차곡히 쌓아온 배우들이 출연한다. 이 배우들이 어떤 조화를 이루며 화합을 이룰 것인가, 개봉 소식을 듣자마자 호기심이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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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맑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골목길 한 카페에서 벌어지는 4개의 에피소드를 병렬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작 기대했던 부분은 이 네 명의 배우들이 어떤 만남과 관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해 나갈까 였지만, 그러한 재미보다는 각 배우만이 가진 매력을 각 에피소드에 녹여내면서 관객들에게 웃음과 소소한 감동을 자아냈다. 짧은 시간 안에 구성된 각개의 이야기들은 잘 조율되고 변주된 실내악처럼 부담 없고 편안하게 흘러간다. 그들의 대화는 흡사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처럼 친숙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 혹은 내 주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정유미는 무명을 거쳐 나름의 인기 배우로 나온다. 커다란 선글라스와 얼굴 전체를 가리는 하얀 마스크를 쓰고 카페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선다. 이제는 일반 직장인이지만 한때 사귀었던 남자를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나기 위함이다. 우리가 보통 배우들에게 갖는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 중에 단연코 금융권 선전지를 빼놓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차마 되놓고 묻지 못하더라도 꼭 한번 묻고 싶은 질문도 있을 것이다. "그 소문 진짜야?" 옛 남자 친구와의 반가운 재회도 잠시, 그녀가 말한 대사처럼 많이 변했다는 말이 되려 씁쓸하게 맴을 돈다. 여전히 정유미만의 유머는 녹아 있다. 직접 사인 용지를 가지고 다니며 사인해 다라는 팬에게 슬며시 해주고, 짐짓 모른 척 옛 남자 친구를 자신의 매니저로 둔갑시키는 깜찍함도 잊지 않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정은채는 고개를 숙이고 정면으로 남자를 바라보지 못한다.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불퉁스럽게 나오는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곱지 않다. 그런 여자 앞에서 남자의 시선이나 표정도 의뭉스럽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빙글빙글 말을 돌리는 것 같고, 상대 여자의 기분을 알아채지 못하는 건지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여자는 화가 나려고 한다. 3일 만나고 말도 없이 여행을 떠나고, 연락도 소식도 없이 불쑥 나타나 그녀 앞에서 웃고 있다.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만 통해서 이들 관계를 역 추적해가는 유추가 은근한 재미이다. 밀고 당기며 서로의 속 마음은 알길 없고, 말은 자꾸 겉돌게 되고 진심은 멀어져 가는 것 같은데 어느새 두 사람 사이를 촘촘히 채워주고 있는 감정의 연결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기별 없던 사랑은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나고 멈췄던 시계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을 위한 시간을 선물한다. 사랑은 그래서 그렇게 설레고 남녀의 시작은 가속도가 붙는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남녀가 아닌 여여 커플이다. 젊은 여성과 중년 여성의 미팅 같은 분위기. 그 둘은 함께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중년의 여성은 설탕을 넣고 곧바로 스푼으로 휘저어 거품을 일으킨다. 사무적이면서도 깔끔한 인상의 한예리는 수첩을 들고 연신 중년 여성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며 일정을 조율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지금 이들은 사기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 한예리는 상대에게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줄 것을 부탁하며, 상견례와 웨딩 식장, 딱 두 번의 연기 합을 맞춰보고 있다. 대화는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며 형식적으로 흘러가던 가운데, 한예리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감정이 전환된다. "좋아서요. 아무것도 없는 남자이지만 제가 정말 좋아서 하는 결혼이에요." 이 순간 결혼은 사기가 아닌 진짜 결혼으로 변모하고, 가짜도 어느새 진짜가 된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저녁이다. 초저녁 가을 같은 분위기, 비가 내려 바닥은 촉촉하게 젖었을 것 같고, 술 한잔 하고 온 임수정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뒤를 돌아 카페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생긋 미소 짓는다. "왜 마음 가는 길이 사람 가는 길이랑 다를까." 임수정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눈 앞에 앉아 있는 옛 남자 친구에게도 여전히 마음은 남아 있고, 남자도 회한에 잠겨 있다. 남편이 없는 동안만이라도 사귀자는 대담한 제안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속삭인다. 그 달콤한 제안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마음이 있을까. 어디까지 안전하다고 선을 그을 수 있을까. 늦가을 같은 저녁이었을지도 모른다. 취기에 휩싸여 마음 가는 대로 쏟아낸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이어질 것 같은 미진함에 살짝 들뜬다. 






영화는 김종관 감독이 잘할 수 있고 잘 만들 수 있는 재료와 재질로 솜씨 좋게 빚어낸 듯하다. 일단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다. 그의 전작만 봐도 여성 배우의 있는 그대로의 매력을 세심하게 잘 끄집어낸다. 내추럴하면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펼쳐 놓고, 그 사랑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는 이야기는 (편협한 표현이나마)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다.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기보다 배우의 이름으로 대신 불러도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영화는 길지 않아 오히려 담백하다. 


장소는 골목길의 숨어 있는 동네 카페이다. 대중적인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나만 알 것 같은, 나만 가고 싶은 그런 공간, 비밀스러운 카페. 분위기 또한 산뜻하고 적당히 세련되면서 적당히 힙하고 적당히 빈티지하다. 발길이 닿지 않은 동네에 있을 법한 조용하고 한적한 공간으로 관객들을 유도한다.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저 카페는 어디일까,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알고 보니 플러리스트의 한 작업실을 카페처럼 꾸몄다고 한다.) 


그리고 대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도 달라지고 오고 가는 대화도 테이블 위로 켜켜이 쌓여 가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카페의 여사장일 수도 있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왠지 손님 대화를 엿들으며 공감할 것 같은 분위기) 혹은 그들이 커피와 차, 맥주를 주문하고 부지런히 입으로 손으로 옮기고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그곳, 더없이 안정적이고 아늑한 더 테이블일 수도 있다. 흡사 인물을 위한 소품집이 아닌, 테이블을 위한 실내악 변주 같기도 하다. 영화는 시종 무겁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게 스쳐가지만도 않는,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씁쓸하다. 어느 선에서는 설레면서도 달콤하고, 언어로 다듬어 공들인 한 잔의 커피 같기도 하다. 아니면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한 장 한 장 손으로 넘겨 읽는 단편집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침묵. 대화의 공백 사이로 스며드는 침묵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이루는 공기와도 같다. 조용히 차를 마시고, 숨을 쉬고, 할 말을 머리 속으로 고르며, 귀 기울이기 위한 침묵. 엉뚱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과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나긋하게, 서로에게 집중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입술에 침을 바른다. 보는 사람도 제3의 인물이 되어 그 옆에 앉아 경청하고 있는 것 같은 몰입감. 시선은 카페 테이블 위로, 유리창 밖으로, 찰랑거리는 물컵으로, 작은 꽃병으로, 조각조각난 꽃잎으로 이동해 간다. 어떨 때는 주인공들의 뒷모습,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함께 숨 고르기를 하며 기다린다. 






90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 7일이라는 짧은 촬영을 거쳐 만든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이야기만을 논하고 있다 평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단골 카페가 있다면 누구라도 느낄 법한 공통의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식물과 꽃, 책, 오래된 나무 테이블, 폭신한 쿠션 의자, 그 위로 안착하여 주문한 커피 향을 깊숙이 들이마실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누그러짐, 온화함 같은 것, 가볍게 풀어지기도 하고 적당히 긴장된 상태에서 상대의 말과 나의 말을 주고받으며 리듬을 형성해가는 둘 만의 내밀함. 아마도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민, 호기심 때문일까. 징글징글하게 얄밉고 이해할 수 없어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나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한 켠의 부채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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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개인적으로 세 번째 한예리 배우가 나온 에피소드가 마음을 흔들었다. 갑자기 대화의 분위기와 감정이 전환되면서 진짜인 것 같은 순간이 영화가 부린 마법처럼 마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카페 사장이 읽던 책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녹턴>이어서 내심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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