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개인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 Sep 07. 2017

영화 <우리의 20세기>

#사적인 영화_02: 당신과 나, 우리가 기억하는 20세기는...  


*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9월 27일 개봉 예정인 영화 <우리의 20세기>를 먼저 만났다. 스토리 한 줄 읽지 않고 출연 배우와 제목만 보고 시사회에 참석했다. 영화 <더테이블>이 국내 여성 배우의 세밀한 연기가 주(主)였다면 <우리의 20세기>는 외국 여성 배우 버전 같았다.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영화 보는 내내 위안을 얻는다. 아네트 베닝, 그레타 거윅, 엘르 패닝... 그리고 감독은 <비기너스>를 만든 마이크 밀스, 영화 <그녀>의 제작진이 참여했다. 원제는 <20th Century Women>이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20세기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모티브 일 것이며, 그 여성들은 아마도 감독의 가까운 주변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구체적이며 사실적이었다. 디테일한 감정도 놓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여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시간도 짧게 느껴졌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고 각자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쉼 없이 촘촘한 서사로 채워진다.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거나 중언부언 이어지는 대사들, 산만하게 흩어지는 연결이 집중을 방해하거나 흐름을 늘어트려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생을 계속해서 엿보고 싶은 열망은 영화가 끝이 나도 계속해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갈증으로 이어졌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름의 갈등을 겪고 사소한 사건 속에서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과정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려는 노력, 도덕적인 잣대로 상대를 평가하지 않으려는 자세, 대화를 통한 교감과 이해가 서로 맞물려 교차하고,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불완전한 세상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더 훔쳐보고 싶었고, 느껴보고 싶었다. 


20세기만이 지닌 무드와 향수와 그 정취를, 말도 안 되게 엉망이고, 말도 안 되게 그리운 그 시절만이 지닌 뜨거운 무언가를, 그리고 뒤돌아 나만의 20세기를 추억한다.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의 나에게 21세기의 내가 편지 한 통을 쓴다. 나의 기억과 추억의 20세기는 어떤 시대였던가.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 뚝 떼고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한 세기를 동시에 걸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시대의 흐름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1979년 산타 바바라에서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며 15살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를 혼자 키우며 살고 있는 도로시아는 사춘기 아들이 위험한 행동을 할 때마다 덜컥 겁이 난다. 제이미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도로시아는 함께 살고 있는 포토그래퍼 애비 (그레타 거윅)와 소꿉친구 줄리 (엘르 패닝) 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제이미 곁에서 그를 돌봐달라고. 애비와 줄리는 동시에 반론을 펼친다. "제이미에게는 어른 남자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도로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남자는 필요 없어, 너희들만으로 충분해. 제이미가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줘." 이 사실에 제이미는 분개하며 자신의 엄마가 대공황 세대라 잘 모른다며 애비와 줄리에게 사과를 한다. 하지만 이미 애비와 줄리는 제이미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줄리는 비밀이 많은 소녀이다. 제이미와는 철저하게 친구로 지내며 스킨십을 자제하지만 여러 남자와 서슴없이 섹스를 나누며 스스로를 파괴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신문사 포토그래퍼로 일하는 애비는 예술적 소양이 높은 재능 있는 아티스트이지만 자궁경부암의 위험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와 셰어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한편, 셰어하우스에는 윌리엄이라는 남자도 함께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도자기에 푹 빠져있지만 정비공으로 그가 못 고치는 것은 없다. 나무 이야기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는 남성적 외모를 지녔음에도 내면은 부드럽고 한없이 다정하다.  


윌리엄이 성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남성의 역할, 주로 어른 남성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비중은 거의 없다. 일단 도로시아는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고 남편과 이혼 후에도 재혼을 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일단 사랑하는 남자를 찾을 수 없고, 자신을 잘 이해할 남자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회사 내에서는 레즈비언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이다.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 싱글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고, 아들의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끄러운 펑크도 듣고 클럽도 적극적으로 찾아간다.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서 성인 남성의 도움을 빌리려 하지 않는다. 제이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했느냐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단정 짓기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혹은 불안해서 만났을 수도 있고 주변을 의식해서 결혼했을 수도 있다고 솔직하게 답한다. 여자는 무조건 사랑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존재가 아님을, 그 시대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시인한다.  


줄리는 한 손에는 담배를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문장으로 사랑을 읽지만 도통 현실에서는 느낄 수가 없다. 제이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극구 섹스는 거부한다. 심지어 오르가슴조차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하는 줄리에게 제이미는 그럼 왜 남자와 잠을 자느냐고 묻는다. 줄리의 대답은 세상의 절반은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지만 오르가슴이 다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자의 눈빛, 남자가 내는 신음 소리, 남자가 지닌 육체, 터치, 그 모든 요소들이 더해져서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야." 세상의 절반은 못 느끼지만 남은 세상의 절반은 느끼기 때문에, 여자의 섹스는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애비는 늘 사진을 찍고, 우울하면 춤을 추고, 펑크를 들으며 자유를 갈망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여자의 행복인지가 궁금하다. 제이미가 좋은 남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페미니즘 책을 선물하고, 모두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왜 생리를 생리라고 말하지 못하느냐고 분노하며 모두가 생리를 외칠 수 있도록 독려한다. 어쩌면 제이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애비일 수 있다. 제이미는 그녀를 통해서 세계와 교류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 엄마 도로시아가 느끼는 고독을 이해하고자 한다. 좋은 남자가 되기기 위한 길은 결국 좋은 사람이 되는 길과도 같다.  






친구는 이 영화를 가리켜 흡사 마인드 맵을 펼쳐 놓은 것처럼 제이미를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세 여자의 이야기가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 같다, 고 하였다. 1979년이 미국에서 어떤 시기였는지, 겪어보지 못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감히 단언할 수 없다. 아마도 뜨거운 용광로처럼 들끓는 시대가 아니었을까,라고 짐작만 해본다. 여성과 남성, 구세대와 신세대, 어른과 아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자유와 평등, 마약과 클럽, 마초와 페미니즘... 전쟁 이후에 찾아온 권태와 게으름, 낡은 것은 옳지 못한 것인가, 지금보다 더 좋은 시절이 올 것이다라는 대책 없는 희망 등등 이것들이 동시에 섞여 들어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21세기도 마찬가지의 진통을 겪고 있다. 20세기의 그들은 소용돌이치는 시절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한 명 한 명이 힘겨운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완벽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나이와 성별을 떠나 누구라도 약점과 편견을 지닌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性)과 사랑과 인생에 대한 담론을 펼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이 그토록 즐거워 보인다. 


도로시아의 꿈은 비행사였다. 나 자신이 나다워지기 위하여,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그녀의 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의 20세기, 우리의 21세기, 우리의 22세기... 어떤 시대가 도래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인생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지금을 행복과 불행으로만 결정지을 수도 없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돌아보고 긍정하고 이해하고 변화를 모색해 가는 과정만이 남을 뿐이다.   





덧: 개인적으로 그레타 거윅의 연기가 좋았다. 씩씩하고 명랑한 역할만 보다가 그녀의 짧게 자른 빨강 머리와 우울한 빛을 내뿜는 눈빛과 큰 키를 주체하지 못하여 구부정하게 걷는 모습과 주체할 수 없이 흔들어 대는 춤사위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좋았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들과 인물 소개와 캐릭터 설정과 섬세한 연출이 잘 어우러진다. 끊임없이 피어대는 담배와 책과, 그 책 속의 구절들과 자연과 의상과 미술, 음악이 그리는 이미지의 느낌이 노스탤지어 하다. 오래도록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아름답고 인생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모습조차 사랑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더 테이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