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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Sep 10. 2017

영화 <시인의 사랑>

#사적인 영화_03: 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니까 괜찮아.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대신해줄 수 없다. "웰컴 투 더 리얼월드" 관념으로만 시를 쓰던 시인은 진짜 사랑을 통과하고 나서야 간신히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진짜 언어를 가진 시를 쓰게 된다. 사랑은 대신해줄 수는 없지만, 타고 남은 슬픔을 재료 삼아 시를 쓰고 대신 아파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시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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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제주 곶자왈 출신 시인 현택기(양익준)이다. 그의 아내는 동창생 강순(전혜진)으로 늦은 결혼을 올렸다.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이 티격태격 하지만 오래 보고 자란 편안한 가족 같다. 강순은 그를 대신하여 경제적인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다. 택기와 달리 말과 행동은 거칠고 음담패설도 거침없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인물이다. 결혼 다음으로 욕심이 나는 것은 자식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택기에게 일방적인 관계를 요구하며 아이를 갖자고 채근한다.  택기는 괴롭다. 그의 머릿속은 아이보다는 온통 시로 가득 차 있다. 거리를 걷고 버스를 타고 하늘을 보고 집에 들어오고 책상에 앉고 게임을 하고 밥을 먹고 강순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이 인생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며 시어를 고르고 고심하는 작업에 열중한다. 정자 감소증에 남은 몇 개의 정자도 움직임을 거부하는 와중에 아내의 바람대로 내키지 않은 일은 다 하려고 노력한다. 병원을 가고 사정을 하고 정자를 담아 인공 수정에 협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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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영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도 따라가기에 무리가 없다. 시트콤을 보듯 둘이 옥신각신 하는 모습은 일상과도 닮아 있다. 시인의 어눌함과 아내의 능글맞음은 대조를 이루며 그 낙차 사이에서 웃음이 발생한다. 일상은 새롭지가 않다. 똑같은 풍경으로 이어져 만나는 사람도 같고 반복되는 하루의 연속이다. 차라리 오늘처럼 똑같다면 좋았을 텐데, 변수는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씨앗은 싹을 틔운다. 이 바닷가 동네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현란한 던킨 도넛이 집 맞은편에 생기면서 일상의 작은 균열이 생겨난다. 우울해지면 단 걸 먹어야 한데, 안 먹겠다고 항변하는 택기의 입 속으로 강순은 꾸역꾸역 도넛을 밀어 넣는다. 택기는 이내 도넛의 맛에 빠져든다. 달콤하고 알록달록한 도넛, 도넛이 없으면 이내 불안이 찾아오고 택기의 머리 속은 도넛 생각으로만 가득 찬다. 도넛, 도넛, 도넛이 가까이 있는 곳으로 시인은 자리를 옮겨 하루 종일 가게 안에서 손에 잡히지 않은 하루를 멍하니 흘려보낸다. 여기서 시인의 시선은 도넛에서 차츰차츰 가게에서 일하는 소년에게로 옮겨간다.  도넛 대신 소년을 관찰하는 시간은 많아지고 새로운 영감을 얻어 시인은 시를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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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제부터 소년을 의식했을까. 도넛을 사기 위하여 수시로 드나들 때부터? 소년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나서? 우연히 소년이 화장실에서 정사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고 나서? 추운 날 소년이 길 위에 드러누워 있는 걸 보고 나서? 아니면, 소년에게 영감을 받아 시를 쓰면서?


카메라가 무심하게 파란색 직원 복장을 한 소년을 비춰준 적이 있었다. 택기의 시선도 함께 소년을 몇 번 눈으로 스쳐 지나갔었다. 이때부터 택기는 소년을 의식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아무런 생각도 기억도 남지 않았다. 이름도 없는 아무개나 혹은 사물로 치부하며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뒷모습 옆모습으로 보이던 소년이 도넛 박스를 들고 시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물'이라고 했을 때 시인도 비로소 정면으로 소년을 마주한다. 누구를 마음에 담기 시작하는 순간은 의식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전에 먼저 시선이 스치거나 교차하면서 시작된다. 유달리 나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오감이 먼저 시선을 잡아채고, 그다음에 두 사람의 시간은 흘러가고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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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은 말한다. 처절하지 않으면 사랑이라 할 수 없어, 네가 사랑이 뭔지 알아? 시인이 무어라 대답은 하지만 말끝은 흐린다. 소년을 만나고 나서야 택기는 말 대신 시로 마음을 표현한다. 그 처절함이 무엇이며 절박함이 무엇인지 말이다. 날이 서 있는 소년의 방황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싶은 택기와 그에게 서서히 기대하는 소년이 있다. 둘의 감정 선을 이어가며 서로가 의지하고 위해주고 이해하는 모습은 친밀해지기 위한 여정이다. 여기서 영화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깊숙이 서로에게 개입되어 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영화는 깊게 파고들거나 집요하게 파 해치거나 끝까지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달려가지 않는다. 자신은 누군가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기 자신만의 슬픔만을 보고 살아온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하지만, 시인은 소년에게 단 한 명의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이 세상에 단 한명만 있다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으니까, 괜찮아질 테니까. 적어도 시인은 소년이 갖고 싶은 것을 다 주고자 했고 도망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비겁해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 시인의 사랑은 오직 시인의 것이지만 그의 시를 통해 잊고 살았던 그 시절의 사랑을 다시 한번 꺼내본다. 마음이 아릿하고 저릿해서 눈물이 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인의 사랑 앞에서 나의 사랑이 이토록 초라하고 송구하구나,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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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들려오는 시들이 마치 또 하나의 대사처럼 마음으로 흘러 들어왔다. 시나리오는 새롭지 않은데, 오히려 독백처럼 읊조리는 시와 시인이라는 인물 설정이 신선했다. 뚝심 있게 감정을 진하게 끌고 가는 연출도 여운을 남겼다. 초반에 자칫 이 사랑 비루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안절부절못하였지만, 끝난 뒤에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야 말았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이 어떻게 다른지 더 알고 싶어 졌다.


양익준 배우는 느리고 어눌하고 답답한 외면과 달리 생각이 깊고 진실된 내면을 지닌 시인을 연기한다. 마치 이 세상에 무쓸모 한 것은 없다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도 사랑도 무용하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그럼에도 미처 챙기지 못한 감정과 눈물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전혜진 배우처럼 소위 몸빼바지가 잘 어울리는 배우가 또 어디 있을까. 능청스럽고 때론 철없어 보이는 모습과 나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욕도 내뱉고 혼자 쓸쓸히 담배를 피우는 다양한 면모를 물 흐르듯이 연기한다. 소년을 연기한 정가람 배우는 강약을 조절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버럭 고함을 지르다가도 신호를 바꿔 금세 태도를 바꾼다든가, 평소 거칠고 날이 서 있지만 택기와 시어를 나누는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해내며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원석처럼 순수해 보이는 캐릭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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