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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Sep 12. 2017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사적인 영화_04: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훈, 나문희 주연, 김현성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9월 21일 개봉 예정이다.)

 



도깨비 할매라는 별명을 지닌 옥분(나문희)은 20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구청으로 출근하며, 8천 건이 넘는 민원을 신고하는 기피 대상 블랙리스트 1호이다. 모든 업무는 원칙에 의거하여 철저하게 처리하는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는 발령받은 첫날부터 옥분과의 필연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민원 접수도 원칙대로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민재의 사무적인 태도에도 보란 듯이 한 보따리의 서류를 내미는 옥분, 팽팽한 긴장감으로 구청은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런 옥분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영어가 늘지 않는다. 수업 분위기를 흐린다는 명목으로 학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낙담한 옥분은 원어민 수준으로 회화를 구사하는 민재를 보고 자신의 영어 과외를 요청하며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꼭 영어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옥분에게 어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일까.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옥분의 개인적인 이유는 서서히 밝혀진다. 미국에 살고 있는 피붙이 남동생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입양 간 남동생이 모국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옥분은 필사적으로 영어를 공부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시작은 개인적인 출발이었으나, 반드시 영어를 해야 하는 숙명으로 이어진다. 생사의 고락을 함께 한 친구가 알츠하이머로 쓰러지면서 평생 비밀로 간직했던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게 된다. 비극적인 역사가 치른 전쟁의 현장 속에서 여자이기를 포기해야 했고 부모와 나라도 지켜주지 못한 그 아픔을 가슴으로만 묻으며 숨어 지내야 했다. 옥분은 생존하는 위안 군 할머니였다. 아무도 몰랐기에 그 사실은 충격적이다.


옥분은 새로이 할 일이 생겼다. 친구가 하려던 일을 대신해야 한다. 미국 의원 앞에서 일본의 만행을 직접 영어로 폭로하고 그들의 악행을 널리 알려야 한다. 뼈를 깎고 피와 살이 녹아내릴 것처럼 생생하게 새겨진 그 아픔과 상처, 홀로 가족 없이 지내야만 했던 서러움과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역사가 저지른 죄악을 밝혀야 한다. 일생 시장을 벗어난 적 없던 할머니는 영어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향한다.




<아이 캔 스피크>는 약 4년의 개발 과정을 거쳐 완성된 프로젝트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위안부 피해자임을 숨기고 살아온 할머니가 바로 우리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과 세계에 알리고자 영어를 배우려 한다는 점이 기존과는 다른 차별화된 접근 법이다. 실제 이 영화는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를 바탕으로 시작됐다. 2007년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 (HR121)이 통과된 실재 사건을 코미디와 휴머니즘을 적절히 배합했다. 그러나 10년 동안 일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나문희 배우는 평소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스스로가 옥분이 되어 연기를 선보였다.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왜 나한테 꽁꽁 숨어 지내라고 했어? 이제는 참고 살지 않을 거야" 라고 눈물로 토로한 장면은 개인적으로 슬픈 장면이었다. 옥분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렇게밖에 할 수 없게 만든 당시 사회와 개인의 탓으로 여겨졌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실제 미국 의회에서 촬영을 진행한 클라이맥스는 긴박감 넘치는 현장에서도 긴 영어 대사를 직접 소화했다. 한 단어, 한 문장 곱씹으며 옥분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가눌 수가 없다. 옥분과 함께 의회에서 증언했던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미첼 할머니 또한, 92살의 고령이 믿기지 않는 연기의 몰입감을 주었다. 비단 이것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새로이 알수 있다.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서던 민재와 옥분은 영어를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가까워진다. 피곤하고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던 민재는 옥분의 청을 끝까지 거절한다. 그런 그가 마음을 열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유일한 가족인 남동생이 옥분의 집에 들러 집밥을 먹는 걸 목격했고, 외식 아니면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던 민재 또한, 옥분의 따끈한 집밥을 먹자마자 원칙적인 자신의 신념을 손쉽게 져버린다. 대신 고등학생인 남동생이 언제든 찾아오면 밥을 해주는 조건으로 무상으로 영어 과외가 시작된다. 한국 영화에서 집밥이 지닌 위력은 대단하다. 대부분 집밥은 남자가 하지 않는다. 여자 친구, 어머니, 할머니... 다양한 연령의 여성이 혼자 사는 남성에게 지어주고 남성은 감동하고 마음을 열며 가까워진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밥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기묘한 부분이다.  



영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모두가 흥미로워할 부분이다. 이 놈의 영어,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정도(正道)로만 걸을 것 같은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가 가르치는 영어는 책상 위의 공부가 아니다. 절대 손으로 필기하거나 암기하는 방식이 아니다. 공을 주고받듯 쉬운 영어라도 자유롭게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알까기를 하면서도 의성어나 대화는 반드시 영어로 해야 하고,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서도 외국인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중요한 영어 구절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하우아유?' '아임 파인 땡큐 앤유?'이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누구라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문장, 이것만 알아도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할 수 있다. 특히 옥분에게는 하나의 주문과도 같다. 영어로 대화하기 전에 준비운동처럼 긴장을 풀어준다. 말은 긴장하고 있을 때 나오지 않는다. 우선은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주변이 나의 편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그리고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때, 언어를 빌려 나의 뜻을 전하고 관철시키는 힘이 생겨난다.    




120분의 영화는 숨 가쁘게 옥분이 영어로 의회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위하여 달려 나간다. 민재라는 캐릭터 역시 옥분을 위하여 조력하는 인물로 발 벗고 나선다. 원칙에서 벗어나 인간적으로 공감하고 대의를 위하여 힘을 보탠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많은 민원을 넣고 다니는지 알아?" 민재가 대답을 못하자 남동생은 간단하게 정의를 내린다. "외로워서야." 혼자 사는 노인, 혹은 여성이라면 사람이 그리워서 오지랖을 부리며 세상 일에 참견하고 다니는 것은 아닐 텐데.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강력한 목표를 지니고 있고, 의도가 강하다 보니 서사가 단순해지고 어색한 부분도 있다. 시장에서 일하는 인물과 구청 공무원의 성격과 패턴이 천편일률적으로 단순하고 사건의 갈등도 어렵지 않게 해결되거나 굳이 없어도 될 유머나 개그가 끼어들고 휴머니즘적 감동에 의지하려는 부분도 있었다. (제목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제목 짓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웃음을 과장하거나 부풀리기 식의 코미디가 아니라는 점, 따뜻하게 돌아보고 살피는 영화라는 점, 결국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 할머니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반드시 사과를 받고야 말겠다고 오늘 하루도 주먹을 불끈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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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조연들의 연기도 맛깔스러웠다. 그중 옥분과 친하게 지내는 슈퍼마켓 진주댁은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나문희 배우와 모녀 역할을 했던 염혜란 배우이며, 족발집 사장 혜정은 <연애담>의 이상희 배우가  맡았다. 오래전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우연한 자리에서 마주한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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