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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Sep 05. 2017

리베카 솔닛 내한 강연 (2부)

가디언 에세이 <<만약 내가 남자라면>> 작가 낭독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리베카 솔닛은 자신이 직접 쓴 에세이를 수백명이 모인 강당에서 낭독했다. 강연회 시작 전, 김명남 작가가 번역한 글을 미리 받았고, 현장에서는 리베카 솔닛이 읽으면 통역가가 번역한 글을 읽어주었다. 이를 귀로 듣는 사람, 눈으로 함께 읽는 사람 등,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이 시간을 통과했을 것이다. 짧지 않은 글이었지만 장내는 침착하고 조용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조차도 당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전문을 옮길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구절은 밑줄 치고, 그 단락들만 한데 모아 놓았다.





<<만약 내가 남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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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인 것의 많은 측면이 좋다. 하지만 가끔은 여자인 것이 감옥이고, 그래서 가끔은 만약 그 감옥에서 벗어난다면 어떨까 몽상해본다. 물론 남자인 것도 다른 측면에서 감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나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불문하고 많은 남자를 알고 좋아하는데, 가끔 그들이 짊어진 짐을 보면서 내가 그것을 짊어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여기곤 한다. 대체 남자라면 해서는 안 되고, 말해서는 안 되고, 느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게 왜 그렇게 많은지. 남자아이들은 끊임없이 감시하여 이성애적 남성성의 관습에 들어맞지 않은 행위라면 뭐든지 금기하는 시선, 혹은 그런 행동을 저질렀을 때 처벌하는 시선은 어찌나 강력한지. 요즘도 자아 형성기의 소년들에게는 동성애자 같다느니 계집애 같다느니 하는 말이 - 즉, 이성애자 같지 않다느니 남자 같지 않다느니 하는 말이 - 최고의 조롱으로 통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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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가 건강히 살아 계셨을 때, 나는 내 문제는 내가 완벽한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어머니가 딸인 내게 기대하는 바는 어머니가 세 아들에게 기대하는 바와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이것도 역시 내가 농담 삼아 하곤 했던 말인데, 어머니에게 아들들이 어머니 집 지붕을 고쳐줘야 하는 존재라면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고쳐줘야 하는 존재였다. 어머니는 내게 불가능한 역할을 요구했다.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제일 친한 친구이자, 자신을 보살펴주는 존재이자, 언제라도 무엇에 대해서라도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자신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역할을. (...) 그런데도 어머니는 내가 누린 기회들을 원망했다. 자신은 그런 기회들을 누리지 못했다고 느꼈기 대문이다. 대학부터가 그랬다. 어머니는 대학에 진학하라는 격려를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남자 형제는 받았다고 했다. 그런 적개심은 어머니 세대와 내 세대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직업적 경력이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남을 돌보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조금쯤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나도 어머니에게 헌신하는 역할에서 떳떳하게 벗어날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도 어머니에게 헌신하는 역할에서 떳떳하게 벗어날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독립적인 삶을 살면서 일에 전념하느라 어머니의 수발을 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내 삶을 바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남편을 얻어서 아이를 낳는 방법이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내게 이 말을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다. "아들은 결혼하면 남이지만, 딸은 평생 딸이란다." 어머니의 그런 기대에는 이런 숨은 뜻이 깔려 있었다. '나는 내 삶을 남들에게 희생했어. 그러니까 너는 네 삶을 내게 희생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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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자아이였을 때 내 지성과 지적 작업을 단연코 좋은 일로, 자긍심의 원천으로 여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들을 속상하게 만들거나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세심하게 다뤄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말이다. 이성애자 여성에게, 성공은 암묵적 실패를 담은 것이기 쉽다. 세상이 생각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성공이란 남자가 스스로를 신처럼 힘 있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 동안 여자들은 남자를 실물의 두배 크기로 비춰주는 마술적이고 기분 좋은 거울 역할을 해왔다."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많은 뛰어난 남자들에게는 그들의 경력을 도우면서 그들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배우자가 있었다. 요즘도 성공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여자의 인생에서 최고의 성취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여자들 중에는 멋지게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적잖은 수는 남편의 조력자 겸 시녀라는 역할로 축소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런 여자가 이혼을 하게 된다면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일구고 유지해온 정체성과 이혼하는 셈이다. (...) 누구도 멋진 경력과 가정을 둘 다 갖춘 이성애자 남성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둘 다 잘해내느냐고 묻지 않는다. 아내가 그 비결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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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나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떤 남자들은 자신이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상대 여성이 실제로는 아는 데도 모른다고 가정한다는 것에 관한 글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내가 2008년에 썼던 글은 지금까지도 계속 읽힌다. 아마 그 글이 수많은 여자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일부 남자들에게도 공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나온 한 기사에 따르면,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는 이제 30개 언어에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현상의 바탕에는 여성을 영원한 청중으로 여기는 시각이 깔려 있다. 맨스플레인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조짐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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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여성에게 성공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남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거추장스럽게 큰 무엇, 우리가 주기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하는 무엇. 사람들이 성공한 여성을 파트너로 둔 남자에게 쓰는 표현만 봐도 - 의연히 받아들인다, 신경 쓰지 않는다, 괜찮게 여긴다, 잘 처리한다, 쿨하게 받아들인다 - 여성의 성공은 남에게 방해가 되거나 부적절한 행동으로 여기진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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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올여름, 여대에 진학한 한 여성은 내게 고등학교에서처럼 눈에 띄는 몇몇 남학생이 교실 내 대화를 독점하지 않는 지적 환경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했다. 새벽 세시에도 안전을 염려하지 않고 캠퍼스를 걸어서 귀가할 수 있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라고 했다. (여자들도 물론 성폭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 수는 남자들이 저지르는 수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적다.) 여자들은 온라인에서도 표적이 된다. 작년에 트위터에서 작은 실험이 있었다. 저널리스트 서머 브레너가 남자 형제의 사진을 빌려서 자기 프로필 사진으로 내걸고 자기 이름을 머리 글자로 바꿨더니, 이전에 온라인에서 무수히 겪던 성희롱이 거의 전혀 없는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고 했다. 여자들은 그저 남자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이라도 가끔 남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곤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가끔 다른 사람처럼 다뤄지고 싶은 것뿐이었다. 혹은, 만약 내가 다른 존재였다면 그랬을 것처럼, 그냥 가만히 놔둬지기를 바란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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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 혼자 있을 때면, 내 의식의 작은 일부분은 이런 생존의 문제에 계속 사로잡혀 있다. 내가 그 문제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곳도 몇 군데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이슬란드, 일본, 몹시 외딴 야생이라서 곰이 유일한 위협 요소인 장소) 많은 작가는 (워즈워스, 루소, 소로, 게리 스나이더) 혼자 하는 산책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짓는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바깥으로부터 계속 방해를 받을 뿐 아니라 안으로부터도, 늘 안전을 염려하는 내면의 감시로부터도 줄곧 방해를 받는다. 나는 물론 내가 백인이라는 점이 이 문제에서는 내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도 안다. 덕분에 나는 만약 흑인이었다면 가지 못했을 곳에 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만약 흑인이었다면 삶이 어땠을까 하는 질문에 짧게 답하자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삶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태어난 실비아 플러스는 19세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나의 비극이다. 그렇다, 제발, 나는 모든 사람과 가능한 한 가장 깊게 이야기 나누고 싶다. 탁 트인 벌판에서 잠들고 싶고, 서쪽으로 여행하고 싶고, 한밤에 자유롭게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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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트랜스젠더들은 사람이 성별을 바꿨을 때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훌륭한 증인 역할을 해왔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성이었을 때와는 달리 갑자기 길에서 통행권을 잃은 듯 남들이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 경험을 하게 되더라는 이야기 (...) 젠더는 우리가 각자 차지하도록 주어진 공간에도, 물리족 공간뿐 아니라 사회적 공간, 대화의 공간, 직업적 공간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가 뉴욕 지도 책을 쓰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우리의 존재는 심지어 경관에도 스며들어 있다. 경관의 많은 요소가 남자들의 이름을 딴 것이고, 여자들의 이름을 딴 것은 거의 없다. (...) 나와 공저자들은 뉴욕의 모든 지하철역 이름을 위대한 뉴욕 여성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새 지도를 만들어보았다. (...)  그때 한 유색인종 여학생은 자신이 평생 구부정한 자세로 살아왔지만 만약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의 이름이 여기저기 붙은 도시에서라면 몸을 곧게 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또다른 여학생은 과연 여자의 이름을 딴 거리에서도 성추행을 당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해주었다. 세상의 표면은 고르지 않다. 거기에는 우리가 걸려 넘어질 것들이 잔뜩 있고, 우리가 새로 만들어낼 여지가 있는 공간도 잔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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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인 것이 좋다. 나는 공원이나 식료품점이나 다른 곳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그 아이들에게 웃어주거나 가끔은 대화도 나누는 것이 좋다. 그럴 때 나는 누구도 나를 치한이나 납치범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리고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상황이 더 복잡했을 것이라는 점도 안다. 그보다 좀 더 미묘한 이점도 있다. 내가 여자인 덕분에 사적인 관계에서 더 폭넓은 감정 표현이 허락된다는 점이다. 아주 친밀하고, 의지가 되고, 거리낌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 친구들과의 우정에서 그렇다. 그리고 나는 또 성인이 된 뒤 줄곧 게이 남성들과도 그런 우정을 누렸다. 그 친구들은 대담하고 흥겹고 멋지게 남성성의 규칙들을 깨트려왔으며, 나로 하여금 우리의 진정한 존재와 우리가 강요받는 존재 사이의 간격을 웃어님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해방은 전염되는 사업이다. 그리고 젠더를 해체하여 재조립하는 사람들 곁에서 성장한 것은 나 같은 이성애자 여성의 해방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니, 나는 남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냥 우리가 모두 자유롭기를 바란다.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은 리베카 솔닛과 그녀 어머니와의 관계이다. 비단, 미국 백인 모녀의 관계라고 규정짓기에는 놀랍게도 한국적인 모녀 관계와도 꽤 닮았다. 어떤 엄마는 유달리 딸을 자신의 소유물로 정해놓고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마음대로 조정하려 든다.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부당한 경험과 상처를 고스란히 딸에게도 전가하려는 면도 있다. 모르고 살았더라면 차라리 편했을텐데, 더이상 참고 두고볼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린 것 같다. 억압받고 학대받고 억울하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사그라진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목소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기꺼이 전염되는 편을 택할 것이다.  


십대부터 줄곧 들어왔던 말이 있다. "너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어." 분명 여자도 능력을 갖고 목표를 성취하며 원하는 삶을 (남자와 동등하게) 선택하며 살수 있다고 부모와 학교로부터 배웠지만, 끈질기게 등 뒤에 따라 붙던 말은 이와는 정 반대였다. 몇십년이 지나서야 그 말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어 왔는가를 고민하고 스스로를 부정해야 했던 원인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젠더는 여자는 물론 남자에게도 그들의 자유와 표현을 억압하는 기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남자이든 여자이든,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한 개인으로, 한 사람으로써 바라는 바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거 하나만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라도 젠더로 인한 혐오, 불평등은 사라져야 하며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 지는 시대를 희망한다.






* 본 내한 강연은 2017년 8월 25일, 리베카 솔닛의 <<만약 내가 남자라면>> 낭독 일부를 옮겨놓았고, 사견을 덧붙였습니다.

* 낭독의 오문 및 수정 사항은 문의 바랍니다 (전문 출처: https://goo.gl/hxgvBf)


* special thanks to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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