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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Oct 24. 2017

영화 <유리 정원>

#사적인 영화_07: 인간의 욕망이 불러들인 파국의 종말.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0/25일 개봉 예정)




영화 <유리 정원>의 배경은 거대한 숲이다. 숲을 찾기 위해 제작진은 방방곡곡을 헤맸다. 강원도부터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경상남도 창녕 우포늪을 발견했다. 근처 주민들도 몰랐던 비밀스러운 숲. 늪으로 둘러싸인 기묘한 분위기의 그곳을 발견했다. <유리 정원>의 또 하나의 캐릭터, CG가 아닌 실재하는 나무와 숲은 동화 같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오싹한 경이를 선사했다. 





재연(문근영)은 절름발이다. 집의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고, 연구소의 긴 복도를 절뚝거리며 걷는 모습은 안쓰럽고 처연하다. 그녀는 이 도시 어디에도 섞이기 어려운 이물질 같다. 그런 재연을 유일하게 맞춰주고 이해해준 사람은 같은 연구소의 정교수(서태화)뿐이었다. 그녀는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이다. 그러나 정교수의 배신으로 절망에 빠진 재연은 어린 시절을 보낸 유리 정원으로 돌아가 같은 연구를 계속한다. 재연이 빠져나간 옥탑방으로 작가 지훈(김태훈)이 이사를 온다. 그는 첫 소설 이후로 글을 쓰지 못하며, 생활고에 시달린다. 심지어 유명 선배 작가와 시비가 붙은 영상마저 퍼져나가면서 출판사도 문단도 그를 배척한다. 설상가상으로 몸이 굳어가는 병까지 걸린다. 우연히 벽지가 벗겨지면서 "나는 나무에서 태어났다."라는 재인의 글과 나무 그림에 사로잡힌 지훈은 직접 유리 정원을 찾아가는데... 




그녀는 숲에서 태어났다. 

오래된 고목나무의 껍데기에서 

어느 날 녹색의 젖이 흘러 땅을 적시자 

나무의 뿌리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흙 속에서 기어 나온 아기는 

나무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뼈는 단단한 나무

육체는 부드럽고 하얀 섬유질로 이루어져 있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몸속엔

초록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재연을 만난 지훈은 <유리 정원>이라는 웹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재연을 모델로 한 그녀의 기괴한 실험과 일상을 다룬 소설은 단 번에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소설의 영감으로 접근했던 지훈은 어느덧 재연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이 연민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오가던 그는 마지막 연재를 앞두고 재연의 비밀을 목도한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결말을 쓰지 못하고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출판사 대표의 협박으로 끝내 소설을 완성하는데, 재연과 지훈 모두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끝내 나무가 되고자 해던 재연과 그녀를 지켜봐야만 했던 지훈은 인간이 가진 욕망 때문에 파멸해버린 쓸쓸한 종말을 맞이하고야 만다. 


자연과 인간이 지닌 광기, 과학도와 소설가, 돈과 명성, 제삼자의 욕망이 끊임없이 줄다리기하듯 교차하는 모습은 어딘가 우리와 닮았다. 그래서 더욱 괴기스럽고 미스터리 하며 소름 끼친다.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집착은 안타깝고 허망하다. 자기 자신이 옳았다고 끝까지 믿고 싶어 하는,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과거의 사랑을 품고 사는 재연은 가련하다. 지훈 또한, 재연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면서도 사회적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공감과 이해를 통한 소통에는 서툰 사람들이다. 소외되고 결핍되어 있는 이들에게 사랑조차 물질이다. 나무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재연조차 그 안에서 편안하지 못하다. 





영화 <유리 정원>은 소설적 구성과 소재를 취하고 있으나, 캐릭터와 대사, 스토리에서의 신선함은 아쉽다. 배우의 캐릭터와의 케미는 겉돌고, 대사는 진부하며,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스토리는 빛을 바랐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시감은 영화를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의도와 주제는 알 만하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나 연출은 구태의연하여 도리어 의문이 발생한다. 


내가 본 신수원 감독의 전작 <레인보우>와 <명왕성>은 거칠지만 날카로운 통찰력과 치부를 찌르는 예민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유리 정원>은 그 전작만큼의 날카로움이나 공감은 찾을 수 없었다. 순정만화를 보는 듯한 자기 연민과 과시적 효과가 거추장스럽다. 어깨에 힘을 많이 주어 위화감이 느껴지는 설정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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