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영화 14: 실존의 부재, 관계의 역사, 시간과 존재, 사랑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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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아름답다, 사려 깊다, 미스터리하다, 사랑스럽다, 특별하다, 감동적이다, 애틋하다 등의 호평 찬사를 받았다. 1.33:1의 고전적인 화면비율로 마치 인스타그램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프레임의 모서리를 원형으로 부드럽게 처리했다. 이 화면 위에 한 겹을 더 입히는 비네트 효과를 통해 빈티지한 무대를 극대화했다. 또한, 세련되고 몽환적인 멜로디를 앞세워 가성비 높은(?) 특별한 판타지 로맨스 영화를 완성시켰다. 테마곡 'I Get overwhelmed'은 무언가에 압도되어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느낌을 잘 살려냈다고 감독은 극찬했다.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영상과 압축적이면서 생략적인 스토리, 캐릭터의 생생함과 고스트의 사랑스러움이 더해져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감정의 여운은 진하게 남는다. 사랑을 떠나보냈거나, 지금 현재 사랑 중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이자 사랑의 부재와 상실, 실존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범위로까지 확대시켰다. 탄탄한 구성의 플롯까지 단단한 단편 소설을 읽는 것처럼 좋았다.
작곡가 C(케이시 애플렉)와 그의 연인 M(루니 마라)은 낡고 작은 교외 집에서 고요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C의 죽음은 모든 것을 뒤집는다. 병원 영안실에서 연인의 죽음을 마주한 M은 눈물 조차 흘리지 못하고 흰 천을 다시 얼굴 위에 덮고 나온다. 그러나 C는 천을 덮어쓴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그가 있어야 할 장소, 그녀가 있는 집을 향해 유영하듯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남겨진 M은 여전히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슬픔에 젖어 지낸다. 자기 옆에 고스트 C가 있다는 것을 알길 없는 M은 그를 추억하며 지낸다. 마침내 이사를 결심한 M, 마지막으로 작은 쪽지를 남겨 기둥 틈새에 숨겨놓고, 남겨진 C는 덧없는 시간의 두께를 홀로 견디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린다.
불과 작년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케이시 애플렉과 <캐롤>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한 루니 마라의 만남은 이미 예고된 바였다. 이 둘은 2013년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를 통해 운명적 로맨스를 연기한 바 있다. 두 배우에 대한 감독의 믿음과 애정은 각별하다. 3,4년에 한 번씩 함께 영화를 만들자고 약속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감독 데이빗 로워리는 아직 이름조차 낯선 감독이지만 <피터와 드래곤>으로 먼저 알렸다. 몇 달간 차기작을 고민하던 그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부터 시간, 공간, 사랑이라는 추상적 단어의 개념을 끄집어내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로맨스 영화를 만들었다. "수년간 전 세계의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전통적인 고스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라고 밝히며 '고스트'라는 단어의 애정을 드러냈다.
케이시 에플렉은 무거운 하얀 천을 덮어쓰며 움직일 때마다 만들어지는 주름과 눈구멍만으로 감정연기를 를 소화해냈다. 평소의 걸음걸이까지 바꿔가며 몰입했다고 하며, 간단한 움직임과 시선의 방향 등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며 동선을 완성했다. 루니 마라는 특유의 무표정에서도 슬프면서 처연한 감정을 담아냈다. 말없이 (비건) 초콜릿 파이를 포크로 쿡쿡 찍으며 한입 가득 먹다가 끝내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는 장면은 이 인물이 연인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어찌할 바 몰라 식욕으로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유독 이 장면을 5분 넘게 롱샷으로 찍은 것도, 대다수가 인상적인 장면으로 회자되는 것도 이해된다. 고스트가 된 남자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도와줄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집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햇살은 아름다운 아이러니가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무척 갑작스럽고 건조하다. 원인 결과 없이 죽은 장면만 잔인하게 보여준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고스트가 된 남자는 여러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중에서도 파티 장면에서 한 남자의 대사는 인상적이다. 우리가 음악이나 영화, 문학으로 남긴 유산들은 어떤 흔적으로도 남아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린 모두 죽을 것이고, 당신의 자식도, 그 자식의 자식들도 모두 죽을 것이며 부질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감독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남자의 입을 통해 간결하게 압축한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생전 남자는 집을 떠나기 어려워한다. 이 집에 우리의 히스토리가 쌓여 있다고 아쉬워한다. (영화에서는 '역사' 대신 '추억'이라고 번역했다)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하우스가 아니다. 갑작스러운 부재는 더욱 그의 존재를 드러내고 남겨진 여자는 두 사람만의 역사를 읽고 추억한다. 작은 캠코더를 통해 찍어 놓은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흘러가지 않는다. 잠깐의 순간이 길고 긴 세월이 되기도 하고, 고스트는 과거와 미래, 현재를 넘나 든다. 고스트는 자유롭게 시간을 여행하며 마침내 여자가 남긴 쪽지를 손에 든다. 과연 그 쪽지에 남긴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여자는 어쩌면 남자의 어린 시절처럼 시 한 구절을 적었을 수도 있고, 뻔한 상투적인 말을 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남자와 함께 했던 이 집과 시간에 대해 좋았던 것을 남기지 않았을까. 여러 생각들이 만감과 교차하며 지나간다. 이 이상한 꿈들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판타지 같다.
덧 1: 어릴 때 읽은 전래동화에서 사후 집을 지키는 귀신 이야기를 종종 읽곤 했다. 시골만 내려가도 우리 집을 잘 지켜달라고 곳곳에 작은 음식을 내놓는 모습도. 이 영화의 세계관도 일견 동양적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 옆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 지나다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무섭고 소름 끼친다기보다 자연스러운 세상의 조화나 이치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할 뿐.
덧 2: 케이시 애플렉은 왜 이렇게 연기를 잘 할까. 불미스러운 성추행 사건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루니 마라는 꾸미지 않아도 주위 공기나 분위기마저 특별하다. 앞으로도 이 두 배우가 동시 출연하는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