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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Feb 25. 2018

영화 <리틀 포레스트>

#사적인 영화 16: 영화로 보는 삼시 세 끼, 시골은 그런 게 아니야.

*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 <리틀 포레스트>를 충실하게 담고자 한 원작과 달리 국내판은 주인공 설정부터 한국스럽게 혹은 예능스럽게 바뀌었다. 힐링캠프와 삼시 세 끼를 잘 버무려 놓은 느낌.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반려동물이 주는 귀여움과 보기 좋게 잘 다듬은 요리는 눈요기로 충분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원작이 전해준 고요하고 충만했던 포만감 대신 헛헛한 허기짐은 가시지 않았다. 어디로 왜 사라졌을까.  




주인공 혜원(김태리)은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홀로 고향집을 찾는다.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사박사박 걸어 불 꺼진 방에 온기를 불어넣은 혜원. 이내 배가 고프자 눈밭의 얼지 않은 작은 배추를 찾아 국을 만들고 조금 남은 쌀로 밥을 짓는다.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나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한다. 오랜 동네 친구 재하(류준열)는 이미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은숙(진기주)은 졸업하고 농협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이다. 갑자기 나타난 혜원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친구들, 밤에 혼자 위험할까 재하는 강아지 오구를 혜원에게 맡긴다. 혜원은 엄마와 둘이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의 레시피대로 요리를 하고 당분간 지낼 시골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원작은 도시에서 내려온 젊은 여자가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사계절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을 통해 그려냈다.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를 엄마의 레시피대로 만든 음식으로 추억하고 치유하는 모습도 담담히 그려냈다. 한국판 주인공 혜원 또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시골집을 찾는다. 말없이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안고 어린 시절 엄마한테서 배운 요리를 통해 엄마를 이해해가는 모습 또한 원작과 비슷한 결로 향해 간다. 다만 굳은 결심으로 고향을 찾아 자신의 힘으로 부딪혀 나가는 원작 주인공과 달리 혜원은 잠시 머물다 가려고 했던 시골에서 다양한 체험을 통한 유예의 시간을 갖는다. 



여기 왜 돌아왔냐는 질문에 혜원은 늘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 말한다. 편의점 알바, 인스턴트 도시락, 유통기한이 지난 채로 냉장고 안에서 썩고 있는 야채, 시간도 여유도 없이 쫓기듯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임용고시 공부. 합격한 남자 친구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 하나 보낼 수 없는 자괴감. 어디에도 속마음을 털어낼 수 없는 외로움, 실패로 낙인찍힌 20대를 이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돌아온 시골에서 그녀는 친구와 자연을 만나 심신의 안정을 얻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꿈을 향해 조심스레 기지개를 켠다.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의지를, 두 손으로 가꾸고 만들어 나가는 일상을 통해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간다.  



<리틀 포레스트> 한국판은 장면 장면마다 아름다운 자연이 숨 쉬고 사계절 시간의 흐름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휴식 같은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인위적이다. 일단 시골집부터 너무나 세련됐다. 한옥으로 만들어진 집은 금방 지은 집처럼 현대적이고 주방과 인테리어는 전문업체에 맡긴 듯 인공적이다. 혜원이 만든 요리 또한 보기 좋고 예쁘다. 집에서 떡을 만들고 막걸리를 만들고, 파스타 위에 꽃을 뿌려 먹는 등 자연친화를 강조하지만 어디에도 엄마의 손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주인공이 제철 음식으로 직접 조리하여 만든 한 끼 음식이다. 원작은 시골집에서 진짜 손수 만들어 먹는 것처럼 소박한 음식이 등장한다. 마치 투박한 질그릇처럼 한 끼 음식의 따뜻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판은 돈 주고 요리 수업에서 배운 것처럼 요란하고 과장됐다.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 음식, 예쁘게 데코레이션 된 잡지 화보용 음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심지어 과거 엄마를 회상하는 장면도 옛날 같지 않다. 곱게 머리를 매만지고 내추럴한 의상을 예쁘게 입고 나타나 요리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시간의 간격을 찾아볼 수 없다. 연애 감정을 섞은 친구 관계도 원작과 다른 부분이다. 농담이 오고 가며 미묘한 감정선을 깔아 놓고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영화적 재미를 연출할 수 있겠지만 과연 필요한 설정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재하가 혜원한테 고백이라도 했다면 두 눈 뜨고 못 봤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태리 배우와 문소리 배우를 좋아하여 두 배우가 함께 나오는 장면은 흐뭇하다. 엄마와 딸의 꾸밈없는 연기는 좋다. 김태리 배우는 이 영화에서도 사랑스럽고 밝은, 본래 모습처럼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는 꾸미지 않은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배우 같다.) 


<리틀 포레스트>는 원작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잔잔히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힐링캠프나 삼시세끼 등에서 무장된 힐링 코드는 예능이나 드라마, 책을 통해 지금도 충실히 소비되고 있다. 시골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세상이다. 로망으로 포장된 귀촌이 아닌 리얼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독립적이면서 담담한 영화가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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