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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y 15. 2018

영화 <트립 투 스페인>

#사적인 영화20: 최상의 여행 파트너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5/17일 개봉 예정)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트립 투 스페인(The Trip to Spain)>은 <트립 투 잉글랜드>와 <트립 투 이탈리아>의 뒤를 잇는 트래블 무비이다. 스티븐 쿠건과 롭 브라이든의 만담 콤비가 톡톡이 활약하는 로드 무비는 흡사 여행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다. (이 정도 레벨의 예능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연한 이 두 배우는 본인의 끼와 연기력을 성대모사를 빌려 일상의 대화 속으로 끌어들여 웃음을 유발한다. 비록 이 두 배우의 국내 인지도가 낮아 그 이력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어 어디까지가 각색인지는 알 수 없다. 검색한 바에 따르면 스티븐 쿠건는 배우이자 실제 제작자와 각본가로 활약하고 있다.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의 각색을 통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됐으며 이 영화의 발단 또한 여행기를 쓰기 위한 방문으로 설정, 작가로서의 명망도 지닌 것 같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의 명성을 위협하는 위기가 여행 내내 따라붙는다.) 롭 브라이든 또한, 성우,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개성파 연기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은 국민 배우이다. 영화 속에서도 실제 성격을 빌려왔다면, 스티븐 쿠건는 완벽주의자의 까칠한 면모를 보이고, 롭 브라이든은 반대로 유쾌하고 느긋한 성품을 보인다. 이 둘은 돈키호테와 산초처럼 스페인의 산탄데르, 그라나다, 말라가까지 스페인 전역을 종횡무진한다. 보고 먹고 즐기며 음식과 문화를 탐닉하며, 중년에 접어든 속절없는 인생을 아쉬워하며 아직 늦지 않았다는 식의 유머러스한 수다를 쏟아낸다. 



영화에서 실제 본업이 배우인 이 두 남자, 그러나 여행의 실상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롭 브라이든은 43세에 첫 아이를 가졌고, 육아와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스페인으로 떠나자는 친구의 요청에 두말없이 따른 것 또한, 갓난쟁이 아들의 우렁찬 울음소리 때문이다. 스티븐 쿠건는 스페인에 대한 문화적 소양을 바탕으로 작가 로리 리에게 영감을 받아 여행기를 쓸 포부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비록) 유부녀이지만 전 여자 친구와 재회한 들뜬 기분에 사로 잡혀 있다. 또한, 새 각본의 제작 소식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여행도 인생도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잠시 깜박한 것 같다. 맑은 하늘이 돌변하여 엄청난 폭우로 변하는 순간을 목도한 이 두 남자의 스페인 여행도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즐거운 여행 내내 일상의 자잘한 변화와 번민이 그들을 귀찮게 달라붙는다.  


감독은 "<트립 투 스페인>은 현실 세계를 반영하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휴가를 떠난다 해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매번 짜인 틀에서 변주가 이루어진다는 설정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스페인을 전면에 과시하며 관광지로써의 면모를 강조하기보다 그 안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관광지도 함께 여행하는 파트너는 중요하다. 인생의 파트너를 찾는 것만큼 서로 잘 맞는 여행 파트너를 찾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여행을 두 배 이상으로 즐겁게 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초점도 결국은 사람으로 귀결된다. 물론, 스페인은 아름답고 경외롭다. 이제까지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의 풍미는 시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유유자적하게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여유는 스페인의 그것 자체이다. 60페이지에 걸친 자료 조사를 통해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건축, 음식 등의 다양한 주제를 설명이 아닌 대화를 통해 녹여낸 장면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한편, 각자의 방으로 돌아선 순간부터 두 사람은 자기 앞을 가로 놓인 번민에 휩싸인다.  스티븐 쿠건는 회사 담당자의 퇴사 소식을 제삼자를 통해 듣는다. 게다가 유망한 신인 각본가와 공동 각색으로 이름을 올리라는 제작사의 조건에 크게 소리를 지른다. "난 이미 뜬 각본가라고요! 난 이미 떴다고요!" 여기에 20살의 아들은 여자 친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 여자 친구도 현 남편과의 임신 소식을 알린다. 모두가 있는 힘껏 그를 방해하기 위한 공작을 펼치는 것 같다. 그는 점점 밀려나는 것 같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롭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의 일상은 화려한 배우와는 거리가 멀다. 아내와 오랜만에 사랑을 나누고 싶으나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어김없이 분위기를 깬다. 여행 중에는 가족이 그리웠던 그였으나 현실은 가사와 육아의 반복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빼먹지 않고 이야기해야 할 영화의 재미는 두 배우의 유쾌한 성대모사이다.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를 시작으로 데이빗 보위와 마이클 케인까지, 두 사람의 끝없는 배틀 드립은 감탄의 경지이다. 천생 배우구나 싶을 만큼 유쾌한 볼거리이다. 특히, 데이빗 보위가 인터뷰 중에 자기 이름을 말할 뻔했다는 롭의 일화는 보는 이까지 긴장시킨다. 더 나아가 트위터를 팔뤄 한 것을 사후 발견한 롭은 데이빗 보위가 자기 트위터를 읽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고 표현한다. 그 데이빗 보위가 말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스페인을 여행했거나, 여행할 예정이라면 한 번은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 <트립 투 스페인> 은 작가 로리 리, 셰익스피어, 조지 오웰, 돈키호테와 같은 문학과 스페인 내전, 스페인 종교 재판과 무슬림의 정복에 관한 역사도 깨알처럼 소개한다. 이에 관한 배경을 알고 본다면 더욱 흥미롭고 반가울 것 같다.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는 반전 아닌 반전에 뒤통수가 뜨근해진다. 무엇보다 여행처럼 인생도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예상치 못한 갈등과 고민 앞에서 흔들리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것, 정해진 정답도 루트도 없기에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그 안에 인생의 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와인처럼 인간도 성숙한 맛과 향을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 앞으로 더 살아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래서 한번 떠나면 계속 떠나고 싶은 것이 여행의 묘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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